당일 약속이 깨져버린 나의 이야기
저에게는 징크스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큰 기대를 한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 어찌 보면 정말 슬프고도 안타까운 징크스입니다.
오늘도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거기다 친구가 아주 괜찮은 친구를 소개해준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저는 내심 큰 기대를 했습니다.
아침 기상도 상쾌하고 평소보다 머리 손질도 잘 돼서 컨디션이 좋았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며 머릿속으로 몇 번씩 약속의 상황을 그려봤습니다. '뭘 먹으러 가지?', '만나면 이렇게 인사해야지~'. 그러나 기쁨도 잠시, 불안한 기분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동안 이렇게 큰 기대를 하는 약속들은 항상 갑작스레 취소됐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구한테 확인 문자를 보냈습니다.
나 : '오늘 보는 거 맞지?'
친구 : '당연하지'
나 : '몇 시에 보냐?'
친구 : '나 일단 일 중이라 이따가 말해줄게'
아니 이 패턴은!? 갑자기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약속에 대해 구체적인 시간대를 안 알려주고 마치 자신이 바쁜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이 패턴은 약속이 취소될 때마다 보이는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5시가 넘어 친구에게 메시지가 왔니다.
'오늘 나 늦게 마칠 거 같아. 그리고 그 친구도 너무 늦게 보기는 좀 그렇다고 다음에 보제.'
두둥-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긴 항상 제가 설레발치고 큰 기대를 하던 약속은 이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빼빼로를 만들어 썸녀에게 주려고 했을 때, 대학시절 2년 사귄 여자 친구에게 처음으로 만든 화이트 데이 사탕을 주려고 했을 때 등등 제가 큰 기대를 하는 약속은 항상 이런 식으로 갑작스레 취소돼 왔었습니다.
저는 생각보다 계획적인 편이라 하루에 할 일, 일주일의 약속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삽니다. 당일의 즉흥적인 약속도 싫어하고, 약속이 있으면 항상 일정을 사전에 조율합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약속이 갑자기 파투가 나는 걸 굉장히 싫어합니다. 일정 하나가 틀어지면 다른 일정들도 크게 틀어지기 때문이죠. 예전에는 이런 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기면 친구에게 전화해 화도 내고 욕지거리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이 다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씩씩거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런 일이 생겼을 때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저만의 방법을 세웠습니다.
이제는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상황 속의 '나'에게 기대를 합니다. 예전에는 친구와 약속이 있을 때면, 친구와 만들어갈 스토리나 분위기에 대해 기대를 했습니다. 가령 '오늘은 친구와 강남을 가고, 거기서 맛있는 삼겹살을 먹고, 맥주집 가서 생맥주 한잔 해야지.' 같은 기대를 했습니다. 이제는 이런 기대 대신 그 상황에 대한 '나'에 대해 기대합니다. '만약 친구가 어디 가고 싶냐고 하면 강남을 가자고 해야겠다. 만약 친구가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한다면, 삼겹살을 먹자 해야지, 친구가 술을 마시자 하면, 맥주 한잔 하자 해야겠다'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기대의 주체를 바꾸고 나니, 친구 때문에 약속이 깨졌다 하더라도 별로 화가 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약속이 깨짐과 동시에 나의 기대가 모두 무너졌는데, 이제는 약속이 깨진 것과 나의 기대는 별개가 되었습니다. 비록 오늘 가정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아, 내가 기대했던 일을 하지 못했지만 이런 일이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기대를 다시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약속이 취소됐다고 제 기대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갑자기 약속이 깨져서 시간이 붕 뜬다 하여도 그 시간을 다른 것으로 빠르게 채울 수 있다면 사실 계획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내가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는 일을 파악해 둬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 책 읽기, 글쓰기, 그림 그리기를 이런 식으로 활용합니다. 이 일들은 어디서나 할 수 있고 딱히 큰 도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약속이 깨져서 생긴 시간을 이렇게 글 쓰는 시간으로 활용해 계획을 유지했습니다.
이제는 이런 일이 언제든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외출을 할 때 항상 펜이나 노트를 챙겨 다닙니다. 가끔 그럴 수 없을 때는 언제든 읽을 수 있는 전자책 또는 글쓰기 어플을 이용합니다. 이런 것들이 있기에 약속이 파투가 나도 마음을 그럭저럭 달랠 수 있습니다.
약속이 깨지면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괜찮은 척 해도 가슴 아프기 마련입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저에게 포상을 줍니다. 큰 것이 아니어도 좋고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단지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내가 이런 포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몸이 알게끔 훈련하는 겁니다. 인간은 단순한 동물이어서 이런 보상에 쉽게 사건의 안 좋은 면을 잊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경우 저는 저에게 평소 다이어트 때문에 먹지 못하던 '오징어 덮밥'이라는 포상을 줬습니다. 정말 '오징어 덮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오늘의 약속이 깨진 슬픔이 순식간에 잊게 해주더군요. '약속이 깨지면 보상을 받는다.'라는 메커니즘이 어느 정도 몸에 자리 잡히니 이제는 약속이 깨져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사실 이 글도 약속이 깨짐으로 인해 상처 받은 제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입니다. '뭔 이런 걸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써!' 하시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저는 이 글 덕분에 더 이상 친구에게 전화해 화를 내거나, 혼자 씩씩 거리는 일을 하지 않게 됐습니다. '미래를 결코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 '타인이 결코 내 기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이런 당연한 사실들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왔습니다. 허나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매달리지 않습니다. '오징어 덮밥'을 먹으며, 브런치에 글을 쓰며, 요즘은 이렇게 저를 컨트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떤 식으로 대처하셨나요? 여러분들 만의 노하우가 있나요? 뭐, 그래도 역시 가장 좋은 건 ‘약속을 잘 깨지 않는 친구를 사귀는 것’인 것 같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