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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비문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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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o Choi Jul 15. 2015

잘 몰랐었다

비문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많은 것들을 해결할 수는 없다


arco.choi - 찍고, 쓰다.




늙지도 그렇다고 어리지도 않은 그런 나이, 서른.

그 서른이라는 나이를 통틀어 나에게 있어 사랑이라는 단어는 늘 유의미하게 머물렀다.


참 많이도 생각했다.

‘사랑이 뭘까’하고 말이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의아할 만큼, 내 삶에서 사랑이란 단어와 감정의 크기는 늘 거대했다.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겁 없이 무언가를 시작하게 하기도 했지만, 반면 무언가를 완전히 송두리째 멈추고 파괴하기도 했다.


그런 사랑이란 녀석은 무방비한 상태의 나에게 예고되지 않은 비처럼 너무 쉽게 찾아와 온 맘을 적셨다.


가히 폭력적이란 생각.

그래, 가히 폭력적이란 생각.

그런 생각이 이따금씩 찾아왔다.


내 사랑도, 네 사랑도.



비가 내린다.


겨울의 한기를 덜어내고, 새순 같은 봄이 찾아옴을 알려주는 봄비.

나는 가끔 봄비가 내릴 때면 의식적으로 우산을 챙기지 않고, 비와 마주하곤 했었다.


그땐 잘 몰랐었다. 그게 얼마나 사랑과 닮아있었는지.


비를 온몸에 맞을 때면 마치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 마냥 기뻤다.

사계절 중에 겨울을 가장 좋아했지만, 그래도 왠지 이맘때의 봄비만큼은 겨울만큼 좋았다.

내 오만함과 더러움들 그리고 잔여물처럼 남아있던 작은 죄의식들까지 모조리 씻기는 성스러운 기분.


그렇게 온몸으로 비를 맞이하는 나.

그렇게 온몸이 젖도록 의식처럼 나를 비에 방치시킨다.

그런데 봄비는 항상 내가 지치기 전에 꼭 멈춰버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는 늘 한시적이다.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볕이 몸을 비춘다. 싱그러움으로 함께 내리던 비의 줄기들.

그 촉촉하게 적시던 생기와 일련의 감정들은 한시적으로 내린 비처럼 무한하지 못했다.

적셔진 온 마음은 금세 물 비린내로 불쾌감을 주고, 봄비에 대한 예쁜 기운보단 흉한 몰골만을 가르쳐 준다.

볕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물비린내는 발악한다.


금세 예쁘고 아름답게 기억하는 봄비에 대한 기억은 없고, 비가 묻은 옷을 쓰레기처럼 빨래 통 안으로 휙-하고 집어던지는 내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비가 나에게 왔던, 비와 맞이했던 흔적들을 쉽게 지워버렸다.


비는 생명들을 탄생하도록 돕는다. 그건 마치 신의 권능이자, 생의 시작점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비는 인간이 만든 무엇들을 천천히 부식시키며 깎아버렸다.


탄생과 파괴의 공존이 갖는 아이러니.


양면이고, 이중적이다.


그 이중성 그리고 양면성 안에는 세상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

그 안에 사랑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 아프고 잔인하다.

하지만 나는 사랑을 통해, 이별을 통해 배웠다.


결코 사랑 역시 순전하고 온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슬같이 영롱하던 생기의 소실.

누군가는 결실을 맺기도 했겠지.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늘 다 타 버린 재처럼, 물비린내라며 던져져 버린 저 빨래통의 옷 마냥,

그렇게 소실되곤 했다.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결코 그렇게 되기를 바란 적이 없는데도.   


“내 마음은 이런데, 당신의 마음은 …” 지겹도록 내뱉고 들었던 증명의 요구.

실로 다시 폭력적이며 강제적이다. 사랑만큼 신의 권능을 머금은 것도 없겠지만, 사랑만치 악마의 폭력성을 띄는 것도 드문 것 같다는 생각.


“사랑해”라는 말과 함께 규정하고, 속박하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울어 버리고 마는 극도로 자기중심적 일지 모를 그런 모습들로 만나던 우리.


그 누구와 비교해도 별반 다를 까.


몇 번의 사랑이 있었다. 수십 차례의 만남은 있었지만 사랑은 몇 번뿐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 생기 가득한 사랑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나의 사랑이, 나의 사랑 방식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며 어울리지 않게 해가 뜰 때까지 울던 날도 많았다. 하지만 주변 여러 친구, 여러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별 것 아닌 이유들과 사사로운 습관들로 이별을 맞이하는 연인들이 많았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결과는 비슷한 모습으로 우리 모두 눅눅해진다.


난 강제적인 것들을 거부하기도, 싫어한다. 종일 ‘네네’ 거리는 간신배의 처사를 해본 역사가 없었다.

그래서 늘 문젯거리였던 적이 많았고, 싸움도 잦았을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무작정 꼴린 대로 문젯거리들을  사정하지는 않았다.

나는 논쟁을 피하지 않고 논쟁을 위한 준비도 철저한 싸움에 익숙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이 놈의 사랑이란 것은  준비할 수도, 논리를 적용하며 싸울 수도 없었다.


우산을 준비치 못한 날 비가 쏟아지면 맞을  수밖에 없다.

급한 대로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우산을 사서 쓴다 해도 이미 젖은 곳은 젖은 것이다.

준비를 철저히 한 상태로 비를 맞이해도 모든 비를 막을 수도 없었다.


분명 어딘가는 젖는다.


사랑은 철벽으로 방어하는 나의 마음의 빈틈들을 신통하게 찾아 비집고 적신다.

그렇게 비집고 들어온 사랑은 모든 조건들과 규제들을  해체시켰다.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 상관없이,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슈퍼맨이기도 원더우먼이 되기도 한다.


그 순간을 분명히 기억한다.

온 천지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다.


마치 아주 추운 겨울, 따듯한 아랫목에서 누워 귤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행복하고 따듯하고 포근한 감정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이별이 오고 간다.

우산 틈을 비집어 적셔대던 비처럼, 내 마음에 가득 비집고 들어온 사랑의 수분은 결국 눈물로 내 몸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하지만 마음에 머무르던 사랑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 느껴지는 눅눅함.

시간이 지나도 기름 자국처럼 남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차라리 사랑이 비라면 빨래처럼 깨끗하게 지울 텐데.


사랑하는 동안은 아름다웠다.



분명히 아름다웠다.


절절히 사랑하고 이별한 어느 날 갑자기 쏟아져 오열하는 감정의 폭발.


그리고 “이 사람 없으면 안 되는구나” 하는 마음에 무작정 용서를 구하던 순간들까지.

그 어떠한 것으로도 이 양은 냄비처럼 끓는 애증의 마음을 대체할 수단이란 것이 있을까?


온 거리를 걸어도 그 사람과 함께하던 기억들이 마음을 후비고, 찌르고 파헤친다.


순간 찾아온 기억의 조각으로 기분이 좋았지만,

여지없이 그것들이 이젠 추억이며 과거라는 생각에 통증을 만든다.


나도 그랬다. 당신도 그랬겠지?


내 마음을 들쑤시고, 후벼 파는 사랑과 관계의 자욱.

끔찍한 사건으로 이별을 맞이하던 태연히 이별하던 결과는 별반 다름이 없었다.


아프다.



구구절절 지나간 일들에 대해 대뇌이며 울어봐도.

나는 혼자라는 그 사실만이 더 선명해진다.


비는 멈췄다.


하지만 나의 세상은 흐르지도 증발하지도 않는 비가 가득 차있다.


점점 네가 아니어도 살 수 있을 내가 무섭다.


사랑에 대한, 아니 너는 아직 이렇게 선명한데.

비처럼 내리던 네가 가니 남는 건 아픔의 향취.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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