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너)=우리가 외로운 이유
(나+너)=우리
( )=우리
오랜만에 휴일.
전화번호부 안으로 보이는 수많은 이름들 위로 손가락을 허우적대다,
갑자기 차오른 알 수 없는 감정에 소득 없이 전화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연인이 없어서도.
수더분히 이야기할 친구가 없어서도.
조언을 구할 동료나 선배가 없어서도.
분명. 아니다.
문득 떠오른 희미한 감정 한 자락에 '나'라는 세계 전체는 기묘한 감정으로 흔들렸다.
여태껏 느껴왔던 감정들과는 결이 다른.
어떤 두려움.
일순간 찾아온 감정에 귀중한 휴일은 온대 없고,
온 방안으로 담배연기와 불안정한 감정만이 매캐히 차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계의 초침은 나를 다시 일터로 떠밀었다.
일평균 수면시간 3시간, 월평균 귀가 일수 5일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그날 이후 얼마간, 용변 시간 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만큼 일을 했다.
고통에 가까운 노동들이 달력을 촘촘히 매워댔고,
그로 인해 휴일 간 느꼈던 불안은 점차 잊히는 듯했다.
가까스로 밀려온 일들을 정리하고, 세금계산서를 청구했다.
꾸벅-꾸벅-쿵
생전 처음으로 빈혈을 느끼며 머리를 책상에 처박았다.
"아프다"
처박힌 이마의 통증만이 아니라, 이건 어디가 아파도 분명 아픈 것 같았다.
작업실에서 잔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침대 위로 쓰러지듯 드러누워버렸다.
매트리스의 싸구려 반동과 함께 튀어 오르는 먼지를 바라보다 나는 잠이 들었다.
그렇게 내리 24시간을 자다 깨어난 나는 아사 직전의 고픔을 채우기 위해.
꾸역꾸역 한 끼를 챙긴 후에 집 청소와 빨래 따위로 하루를 보냈다.
금세 어둑어둑 찾아온 밤이 야속했지만, 몸의 회복을 위해라도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무리했던 노동의 흔적들이 온몸으로 느껴져,
내가 왜 이 짓을.. 하는 곰곰한 생각에 잠기다 그날이 떠올랐다.
되새긴 기억에 두려운 감각이 다시 곤두섰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외로움이라는 건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같은 쓸쓸한 느낌..
글쎄. 내가 혼자인가? 하루 종일 팀원들이랑 같이 있고, 미팅도 많이 하고..
뭔가 결이 다르다. 그럼, 뭘까 하고 골똘히 생각하다.
문뜩 메모장에 끄적였던 메모가 생각나 몸을 벌떡 일으켜 책장을 뒤적였다.
책장에서 이 노트, 저 노트를 펼쳐대다 오래된 가죽 양장 노트 한편에 필기체로 휘갈겨진 메모를 찾아냈다.
홀로 추는 춤
(나-너)=우리
( )=우리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힘내라고.
애정이라고 말하면서,
일어나라고.
사랑이라면 같이 쉬고,
애정이라면 같이 놀자.
틀렸단다.
오답의 이유를 묻자,
우리라는 관계로 후려친다.
설명 없다.
우리.
뜬금없겠지만,
메모는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이라는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적은 것이었다.
기억 속에 나는 영화에 심취한 나머지, 극 중에 흐르던 Xavier Cugat & His Orchestra의 `Maria Elena`를 틀어놓곤 장국영을 흉내 내며 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장기 자랑하는 아이처럼 뒤뚱거리며 춤을 춰대던 나는 체 1분도 못되어 주저앉아버렸다.
쪽팔렸다. 그것도 엄청나게 쪽팔렸다.
끔찍한 나의 춤사위는 말할 것도 없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쪽팔린 것은 내 집에서 홀로 춤 좀 췄기로서니 이렇게 쪽팔려하고 있다는 사실.
홀로 있는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아이러니라니.
도대체 나라는 인간이 어쩌다 혼자서 춤도 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는 생각에 곰곰하다 글을 적게 된 것이었다.
당시에 느낀 감정을 온전히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기억한 것은
'나'로서 보다 '우리'라는 집단을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도 꽤나 철학적인 고찰을 했었구나 하며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더 나아진 것도 없는 것 같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노트를 그대로 손에 쥐고 쓰러지듯 바닥에 누워버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주변에 사람이 많아진 것이 문제이지는 않을까?
그럼 사람이 적어지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많고 적고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라면, 깊이에 따른 감정은 아닐까?
물음표가 깜지를 채우듯 머릿속을 가득 채워갔지만, 답이라고 할 만한 생각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내가 느낀, 나의 감정인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낮은 실소가 터졌다.
일터에서는 일로 과열되고, 쉬는 날에는 자학으로 과열되는 멍청한 짓거리라니.
"아- 다 때려치우고, 도망치면 나으려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눈을 닫아버렸다.
닫힌 눈꺼풀로 세상을 검정으로 채우자 이내 잠이 들었다.
나는 빛을 향해 뛰고 있었다.
태양처럼 선명한 빛을 향해 땀을 뻘뻘 흘리며.
한참을 뛰다, 떠오른 생각에 뜀박질을 멈춰버렸다.
"왜, 뛰고 있는 거지?"
헐떡이는 몸을 돌려 뛰어왔던 길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가까워진 빛의 강렬함 때문일까,
끝도 없이 길게 뻗어 내린 그림자는 완전한 검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림자는 나의 옅은 움직임을 따라 우주의 한 조각처럼 찰랑거리고 있었다.
시선을 빼앗긴 듯 한참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태양처럼 선명한 빛을 바라봤다.
빛의 일렁임을 자세히 바라보자 형태도 크기도 알 수 없는 그 강렬함에 삼켜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빛과 그림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머뭇거리던 나는 그림자를 향해 뒷걸음질 치다,
몸을 완전히 돌려 그림자를 밟으며 뛰기 시작했다.
여전히 왜 뛰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왠지 모를 안도감에 발걸음이 가벼움을 느꼈다.
편안해진 마음 탓인지 그림자를 밟을 때마다 물방울 소리 같은 어떤 작은 소리들이 따라왔는데,
그 소리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한참을 빛의 반대편으로 뛰던 나는 뭐가 그리 좋은지, 아이처럼 깔깔거리다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고 싶지 않다. 꿈이 달콤해서 인지 뭔지, 어쨌건 눈을 뜨고 싶지 않다.
그냥 이대로 이대로 이대로 이 검은색 시간에 머무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