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온통 부정적인 생각인 채 잠든 밤.
나는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깨어났다.
악몽을 꾸었겠지만,
내용 같은 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구겨진 듯 구부정한 몸을 타고 흐르는 미약한 떨림만이 얼마나 끔찍한 꿈이었는지를 나약하게 읊조리고 있을 뿐이었다.
*“미-야옹”*
‘쿠’다. 쿠는 내가 키우는 페르시안 품종의 고양이인데, 시끄러운 내 비명이 신경 쓰였는지 어느새 발밑까지 다가와있었다. 착각이겠지만 왠지 위로해주는 기분에 쿠의 미간을 쓰다듬었다.
덕분에 거칠었던 숨이 점차 편안해짐을 느낀 나는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이동해 쿠가 좋아하는 간식을 덜어 주었다. 맛있게 먹는 쿠의 등줄기를 쓰다듬다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침대에 다시 눕지 않은 것은 이런 경우 보통 다시 잠들기까지 꽤 많은 시간과 안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잠들기 직전 피웠던 담배 탓인지 입안이 텁텁해 책상 위에 놓인 2L 생수를 입대고 마셨다. 미적지근한 온도의 생수가 입속 오물들을 끌고 내려가자 몽롱했던 정신이 점차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늘어지게 하품을 한 번하고 눈꼬리에 살짝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잠시 방안으로 정적이 흐르자 누구나 이따금 겪을지 모를 야밤에 작은 소동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실 생각을 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무엇부터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하나의 생각은 또 다른 여러 생각들과 골치 아픈 것들로 이어지다 결국은 깜지처럼 어지러운 상태가 될 뿐이었다.
한숨을 푹 쉰 나는 의자를 휙 돌려 어두운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안 곳곳에는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정리되지 않은 책들이 널브러져 지저분했다.
악몽을 꾸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만한 개판.
어이없겠지만 이런 방구석 풍경을 나는 생경하게 느끼고 있었다.
분명 어지른 것은 나일 텐데, 널브러트린 기억이 없다.
하지만 지금 그딴 게 다 무슨 상관인가, 나는 지금 악몽에 잠을 설쳐 새까만 밤중에 깨어났다. 지금 당장 청소까지 해낼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어지러운 방구석을 계속 바라볼 자신도 없던 나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았으니 당연히.
*“눈 감아 봐, 그게 네 남은 군 생활이다.”*
갑자기 떠오른 군 생활의 기억.
한겨울 보초를 서는 중이었다. 당시 이등병이었던 나를 조롱하듯 말하는 말년병장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대부분 알 테지만, 이런 군 생활 기억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든다. 어찌 되었건 기억 속 말년병장은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 갓 군에 입대한 나를 통해 증명하고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제대한 지가 벌써 10년이 넘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가 밉거나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10년이라는 시간 탓이겠지만, 사실 그의 얼굴이나 당시 상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그의 조롱 투의 한마디만은 너무 선명하다는 것이었다.
분명 그는 조롱으로 고생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하는 처지에서는 결코 즐거울 수 없는 기억임에 틀림이 없었고,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들리는 그의 말에 내 미래가 컴컴한 구렁텅이에 빠진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와 식은땀이 흐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 지난 일일 뿐이고, 트라우마로 새겨질 만한 일도 아니다.
이 기억으로 궁금해진 것은 나의 앞날이 감은 눈의 그 컴컴함에서 벗어난 걸까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자연히 무언가를 이루고 또 자연히 더 나은 삶을 살 게 될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크게 나아진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치열하게 살았고 열심히 살았다 자부하지만 그딴 게 상관이야 있겠는가.
그 정도 통증과 그 정도 노력 정도로 특별취급을 받기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다만 컴컴한 그 기억과 별반 다름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그냥’ 살아서 그런 것 아닐까. ‘그냥’ 열심히, ‘그냥’ 치열하게 말이다.
물론 그냥 살아가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거기다 나는 인간이 넓은 의미에서 동물에 한 종에 지나지 않고, 다른 종에 비해 조금 더 지능이 높은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무슨 소리냐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잘 먹고 잘 자기만 해도 충분히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런 삶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명확한 이유 없이는 작은 것 하나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인간.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보다 그것을 왜 원하는지에 더 시간을 써야만 하는 인간.
무언가 해소되지 못하고 엉킨 거다.
그게 바로 너저분한 방구석 풍경과 이 작은 소동의 이유일 것이다.
끝을 앞에 두고도 아랑곳하지 않던 사랑의 소멸처럼 마침내 나도 재처럼 거무튀튀하게 바스러지고 있는 것일까.
*“나의 이 악몽의 떨림은 지난날 풋사랑의 정열적인 그 떨림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