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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갛게 타오르는 동백꽃, 지나간 모든 꽃은 헛되었다

동백꽃 신상털기

by 별나라


겨울 제주.


나에게 겨울 제주는 긴 머리를 사방으로 미친듯이 날리게 하는 바람이 전부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칼바람. 다시는 겨울에 제주에 오지 않을 듯 제주를 떠났었다.

그리고 십년, 아니 더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다시 찾은 제주 겨울은 내가 기억하는 제주 겨울과 너무 달랐다.

흰 눈이 펑펑 내려 길도 나무도 세상 모두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해안가 바람이 싫어 선택한 한라산 기슭에 자리잡은 숙소는 겨울 왕국 그 자체였다. 너무 멋지다!

스키를 타듯 오르락 내리락을 멏번 하고서야 간신히 숙소에 도착했다.

오호 겨울왕국, 설원의 제주는 진짜 멋졌다.


제주에 도착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동백꽃 수목원이다.

사실 살아가면서 동백꽃을 제대로 만나본적이 없었다. 동백꽃을 보겠다고 찾아간, 오동도, 선운사 등

모두 시기를 맞추지 못해 실패. 어쩌다 한 두 송이 핀 동백나무에 만족해야 했다.

제주에는 동백꽃을 즐길 수 있는 장소가 참 많았다. 갈등의 순간에 항상 느낌 가는대로 한 곳을 선택했고 신나게 드라이빙을 한다.

한라산 중산간도로에는 양옆으로 눈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한겨울에도 쭉쭉 뻗은 나무, 여전히 초록을 뽐내는 나뭇잎들, 하얀 구름을 품에 안은 새파란 하늘.

진짜 '청량함' 그 자체였다. 운전할 맛 난다는게 이런것인가.

한라산을 넘어가니 서귀포쪽은 완련한 봄날이었다. 햇빛이 어찌나 강렬한지 과연 겨울인가...혼란스러웠고, 입고 있는 두꺼운 옷들에 괜시리 민망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동백꽃을 만나게 되었다.

헉....이게 동백꽃이구나. 이런게 진정한 동백꽃구경이구나!

나무가 한 가득인데.. 새빨간 동백꽃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끝도 없이, 동백나무에 동백나무에 동백나무가 즐비했다.

온통 새빨간 덩어리 꽃들이 거짓말처럼 주렁주렁 열렸있었다. 잎사귀들은 또 어찌나 반딱거리며 찐초록인지....

진짜 한겨울 엄동설한에 이렇게 초록이고, 이렇게 붉은 꽃들을 뿜뿜할 일인가. 희한하다 진짜.




여행의 이유


여긴 제주라는 것을 각인이라도 하듯 앙증맞은 돌하르방이 손님맞이에 한창이다.

수목원에 들어서자 진짜 와우~~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진보다 훨씬 더 새빨갛게 치밀어오르는 붉은 동백꽃들에 아찔해진다.

이런 순간일까.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가. 심장이 쿵쿵거리며 새로운 풍경을 맞이하는 풍악을 울리기 시작한다.

첫 장면만 보았을 뿐인데 범상치 않은 예감이 몰려온다. 나는 곧 엄청난 풍경을 마주할 것이다...라는.

그 '엄청난'이라는 것은 꼭 거대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내 심장에 떨림을 안겨주고 오늘 '하루'에 작은 전율과 감동을 주면 그만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정말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졌고, 예상대로 전율과 감동이 파고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특히 손자, 손녀들을 찍을 때를 제외하고는 휴대폰 카메라를 여는 경우가 전혀 없는 우리 파파께서 휴대폰 카메라앱을 열고 사진촬영에 바쁘시다.

엇! 이게 무슨 일? 사람의 마음은 다 같은가보다.



지나간 모든 꽃들은 헛되었다


동백나무들이 촘촘히 심어져 있고 그 사이 사이를 돌아다니며 동백꽃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인생 사진을 찍으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최고의 사진을 건질 수 있는 곳.

두툼한 겨울옷이 원망스럽다. 동백꽃 보러갈 때는 샤방샤방한 옷을 준비하시길.


인간은 원초적 본능으로 꽃에 끌리게 되어 있다. 그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한다.

동백꽃에는 거기에 더불어 또 하나의 매력이 있었다. 색깔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 치명적 매력.

동백꽃은 흰색, 분홍색, 붉은 색이 있다고 한다. 그 중 붉은 색은 장미의 붉은 빛과는 다르다.

장미의 붉은 빛이 원초적인 깊고 짙은 붉은 빛이라면, 동백의 붉은 빛은 어딘가에서 치밀어 올라 붉은 빛으로 내뱉어진 느낌이다. 사연 있는 붉은 빛.

이 강렬하고 마음을 잡아끄는 붉은 꽃들로 인해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모든 아름다운 꽃들을 빛을 잃었다.

지나간 모든 꽃들이 헛되었다.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동백꽃 신상털기


동백꽃은 다른 꽃과는 개화시기가 다르다. 다른 꽃들은 경칩이 되어서야 꽃을 피우는데 동백은 11월 말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해서 2~3월에 만발하는 편이라고 한다. 한겨울에 피는 수려한 꽃을 거의 보기 힘들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고 하는데...나는 이제야 봤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산, 울산, 전남, 제주에서 주로 서식한다. 다른 꽃들이 꽃잎 하나하나 떨여지며 지는 반면, 동백꽃은 꽃잎이 전부 붙은 채로 한 송이씩 후둑후둑 떨어진다고 한다. 초봄에 일찍 피는 꽃들이 나뭇잎사귀 없이 꽃을 먼저 피우는 반면, 동백꽃은 아름다운 꽃과 더불어 두껍고 반짝거리며 전형적인 초록색을 가진 참 예쁜 잎사귀들과 함께 한다. 그래서 더 풍성하고 더 꽉 차게 아름답다. 또한 꽃, 잎, 열매 등 모두가 유용한 성분이라 버릴 것이 없다고 한다.


동백꽃 꽃말은 색깔마다 다르다. 빨강은 기다림, 애타는 사랑. 흰색 동백꽃의 꽃말은 비밀스러운 사랑, 굳은 약속이란다. 또한 분홍 동백꽃은 신중. 당신의 사랑이 나를 아름답게 한다. 분홍 동백꽃은 보질 못했고 흰색 동백꽃은 한 두 그루 심어져있었다.




동백꽃 보러가서는 위만 보지 말고 아래도 봐주세요


사실 1월 중순은 제주도 동백꽃의 끝물을 향해 가는 여정에 있다.

절정기를 지난 동백꽃들이 후둑후둑 떨어져서 마치 붉은 양탄자를 깐듯 나무아래 붉은 그림자를 만들어 놓았다.

나무 위쪽으로는 여전히 동백꽃들이 빼곡하게 촘촘히 박혀있는데, 아래쪽 부분의 꽃들은 이미 땅으로 낙하하여 아름답게 땅을 뒤덮었다.

땅으로 떨어진 꽃들조차 싱그럽게 보였다. 마치 원래 계획된 수순을 차곡차곡 진행하는 느낌이다.


한번 이 동백꽃 양탄자가 눈에 들어오고 나니 계속 이것만 보였다. 너무 이쁘다.

누군가 새신부가 있다면 사뿐히 즈려밟고 웨딩촬영을 한다면 금상첨화일듯한데...아쉽다 이 풍경은 만나질 못했다.




물감색, 오페라


나는 취미로 미술을 배운다. 화려하게 스러져가는 저녁 노을 색을 표현하기 위해 '오페라'라는 색을 구입한 적이 있다.

그 색을 보며 이 색감은 이 노을 말고는 도대체 어디에 쓸까...싶었다.

빛나는 태양을 한껏 흡수한 동백꽃을 보니 '오페라' 색상이 생각이 났다. 그저 붉은 빛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싶었는데 붉은 기운 속에 오페라 색을 품고 있는 듯 했다. 언젠가 실력이 좋아져 동백꽃을 주인공으로 그리게 된다면 꼭 이 색상을 써봐야지.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자태들은 초보자들이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림을 그리며 배우게 되었다.

그 어떤 부분도 똑같은 색이 없으며 모양도 모두 다르다. 제멋대로 형성된 듯 보이는 배열들도 예술이다.

이런 복잡한, 신이 만들어낸 작품들을 툭툭 붓터치 몇 번으로 생동감있게 표현해 낸 천재 화가들이 정말 존경스럽다.


그저 동백꽃 하나뿐인 수목원인데(야자수도 있고 자몽같은 큰 열매들도 있긴해요) 질리지 않고 지치지도 않는다.

혼자 갔다면 더 오랜 시간 감상을 했을 것이다.

제주시에는 이런 동백꽃 군락지가 열 곳이 넘는다고 하니 이 모든 곳을 즐기려면 겨울이 짧다. 다행이다.

해마다, 겨울마다, 아름다운 동백꽃이 피고 지었을텐데 이제야 만나게 되다니...

지나간 세월이 아쉽기도 하고, '모든 것은 때가 있기 마련이다'라는 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혹시나 내가 있는 동안 함박눈이라도 다시 한번 내린다면 흰눈에 감싸인 동백꽃을 보기 위해 다시 한번 와야겠다.


'꽃' 하나로 행복한 하루.


요런 길 걷고 싶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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