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니체에게 '회고'란 무엇인가

비극의 탄생/ 자기비판의 시도 2장

by 아란도

2장(책세상/p11~12:20)



니체에게 하나의 새로운 문제, 즉 뿔이 달린 문제는 ‘학문의 문제’ 그 자체였다. 처음으로 제기된 문제점 많고 의심스럽다고 파악된 '학문의 문제'이다.


니체가 그 당시 “깨닫게 된 것은 두렵고 위험한 것”이었다.


니체는 ‘자기비판의 시도’ 2장에서 《비극의 탄생》의 배경에 대해서 그 자신이 그 당시에 느꼈던 감정을 상기하며 설명하고 있다. 니체는 젊은 “니체가 젊은이다운 용기와 악의를 방출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 책은 바로 《비극의 탄생》인데, 니체는 이 책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만큼 시간이 지나고서 다시 이 책을 본 니체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나는 《비극의 탄생》이 니체의 전체 저작의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니체의 다른 모든 저작물은 바로 여기서 파생된 가지들이자 열매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비극의 탄생》에서 드러난 내용들에 대해 니체는 더 깊이 파고 들어갔고 분석했다. 그러자면 또 다른 연구들과 설명이 필요해진다. 하나에서 계속 가지를 뻗어갔던 것이다. 니체의 기획은 바로 《비극의 탄생》에 대한 주석서들을 쓰는 것이었는지도. 그 자신이 설계한 하나의 세계관은 바로 '세계'에 대한 무한한 긍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분석적이고 회고적인 능력을 겸비한 예술가를 위한 책'이며, 새로운 심리학과 예술가의 비밀들로 가득 찬 책이며, 그 배경에 ‘예술가-형이상학’을 깔고 있다.


니체는 ‘자기비판의 시도’ 2장과 3장에서 16년이 지난 후 이 책을 다시 살피면서 그 자신의 불만족을 표출하고 있다. 니체는 이 책을 보완하는 형태에서, 그 자신의 현재의 시선으로 <자기비판의 시도>를 썼다.


이 책에 첨언하는 형태로서 ‘서문 형식’의 <자기비판의 시도>를 이 책에 삽입하였다. 아마도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만으로는 《비극의 탄생》에 부합하지 않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이 책은 훗날의 니체가 판단하기에 한 사람에게 헌정하는 형태의 책보다는 더 가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이 책을 읽는데 ‘문제’ 시 되어야 할 것을 부각하고 집중 조명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책을 읽는 이들에게 명확한 방향 제시를 할 중요성을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시간에서 건져 올린 사진, 나는 그때 사진 변환 작업 놀이가 재미있었다.










<비극의 탄생이 쓰여지던 시기와 니체의 회고>


니체는 다른 책에서 ‘회고’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회고란 무엇인가? 보통의 경우 회고에 대해서 우리는 관대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회고는 과거 회상 또는 과거에 집착하여 현재를 등한시한다는 정서적 토대에서 그렇다고 보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여기서 말하는 ‘회고’는 지난 시간의 총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우리가 자신의 지난 시간을 회고할 때는 어떠한 태도가 요구된다. 그것은 바로 ‘관조’다. 우리가 관조할 때 그 대상에 어떤 자기감정을 구겨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 또는 사건이 스스로 밀어내어 드러내는 바로 그것에서 무엇인가를 접하게 된다.


회고 역시 바로 그러한 관조의 태도가 요구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회고적 관조의 태도에서 우리는 그저 수동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과거의 시간에 그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 만약 적극적인 개입을 한다면 그것은 ‘감정’의 남용으로 흐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과거(지난 시간)가 스스로 열어 보이는 바로 그것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취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사람은 반성적 성찰을 회복할 수 있다. 반성과 성찰은 때로는 우리를 압박하기도 한다. 현재와 비교하여 차이 나는 것의 본질을 보게 될 때 인간은 어떤 수치심이나 모욕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차이를 그 자신이 갈무리할 수 있다면 그 자신은 거기서 어떤 동력을 취할 수 있다. 시간이란 시공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것들을 회수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은 ‘힘’ 곧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동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명칭이 반성이고 성찰이지 다른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자신의 사이에서 떠돌며 방황하는 것들을 한데 가두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회고적 시간은 그 자체로 반성과 성찰이 무엇인가? 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알도록 강요한다. 그 강요는 바로 나아갈 방향성을 찾으라는 명령과도 같다. 회고는 현재에서 그 자신의 좌표를 찾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예컨대 사람이 현재 그 자체에서만 무엇을 찾아 헤매거나 어떤 좌표를 찍고자 한다면, 혼돈에 빠진다. 사람은 ‘현재 그 자체’에서는 제자리에서만 맴도는 다람쥐와 같다. 현재 그 자체는 방향성이 없기 때문이다.


항상 어떤 대조 지점이 있어야만 현재에서 좌표를 찍을 수 있고, 그 좌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가는할 수 있다. 인간이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사용하는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과거/현재/미래는 방향성 그 자체이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다.


니체의 회고 역시 그러하다. 니체는 그때의 현재에서 특정한 위치에 있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반성적 성찰을 하고 있다. 그렇다. 과거는 모두 항상 특정한 위치에 고장되어 있다. 그렇기에 인간이 과거를 회상할 수 있고, 그 과거의 흔적을 통해서 현재에서 어떤 수정이나 보완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것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니체가 시간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다’라는 수순일 것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서 회수해야 할 것들을 회고를 통하여 현재에서 하게 된다. 어찌 보면 회고는 일종의 정돈이기도 하다. 회고는 취사선택적이기도 하다. 회고는 간추려야 할 것들을 간결하게 정리 작업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인간은 그 자신의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일 것이다. 모든 지난 시간이 다 현재로 오는 것은 아니다. 지난 것은 현재에 총체성으로 온다. 그것은 바로 ‘연결’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의 행위를 연결시키는 기제로서만 작용한다. 회수할 것이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회수되는 것은 모두 정신작용으로서 회수되며, 그 회수에서 어떤 변신이 일어난다. 곧 창작이자 변화일 것이다. 인간의 기억이나 또는 기록은 바로 그러한 중간 기점과 같은 것. 이 방식으로 인간은 현재를 밀어내며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아래는 ‘자기비판의 시도 2장’ 본문을 읽는 이의 입장에서, 단락 구분하여 옮겨 본 것이다.


이러한 니체 사유적 토대를 바탕으로 하나의 책이 나왔는데, 전혀 젊은이답지 않은 과제로부터 나와야 했던 불가능한 책이었다. 이 책은 온통 너무 때 이르고 조숙한 자기 체험들, 한결 같이 거의 전달 가능성의 한계에 놓여 있는 체험들로부터 건립되었으며, 예술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왜냐하면 학문의 문제는 학문의 토대 위에서는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쩌면 분석적이고 회고적인 능력을 겸비한 예술가(사람들이 찾아다녀야 하지만 전혀 찾아다니려 하지 않는 예외적 종류의 예술가)를 위한 것”일 수도 있는데, 심리학적으로 새로운 내용과 예술가의 비밀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 배경에 ‘예술가-형이상학’을 깔고 있다.
청년의 용기와 우수가 가득한 책이며,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에서도 독립적이며 반항적이라고 할 정도로 자립적인 청년기의 작품이다. 노인다운 문제를 다루면서도 청년기의 결점에 묶여 있는 ‘장황함’과 ‘질풍노도Sturm und Drang'를 지닌 처녀작이다(처녀작이라는 낱말이 가진 모든 나쁜 의미에서의 처녀작).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대화에 초청하듯이 관심을 표현했던 위대한 예술가 ‘리하르트 바그너’에게서 거둔 성공을 고려한다면, 이 책은 그 가치가 입증된 책이다. 아무튼 ‘당대의 최고 인물’을 만족시킨 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은 그것만으로도 약간의 배려와 묵인 아래 취급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니체는 《비극의 탄생》이 출간된 지 16년이 지난 그때에 서문을 새롭게 쓰고 있을 때, 그 자신에게 얼마간의 불만족과 얼마간의 낯섦이 그 자신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반면에 니체는 그 자신의 변하지 않는 시선도 고백하고 있다. 그 자신이 《비극의 탄생》을 쓰던 그때의 관점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차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눈은 예전보다 늙고 수백 배 제멋대로이지만 결코 냉담해지지 않았으며, 이 대담한 책이 처음으로 도전한 저 과제에 대해서도 낯설어지지 않았다. 학문은 예술가의 광학으로 바라보지만, 예술은 삶의 광학으로 바라본다.





그때의 11월의 오늘 풍경은 하나의 세계로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 니체 자신이 새로 글을 써서 《비극의 탄생》을 크게 제1부와 제2부로 나누었고, 1부가 서문(서곡)에 해당하며, 제1부〈비극의 탄생. 또는 그리스 정신과 염세주의〉라는 제목을 달고 ‘자기비판의 시도’를 삽입하였다. 제2부는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1장~25장’으로 구성하였다.


해서, 제1부만 책 본문 내용을 거의 다 올리고, 제2부는 부분 요약 발췌 및 인용의 형태로 글을 쓰는 것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래도 책의 본문을 모두 다 올리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