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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샛길' 그리고 '속물형 인간'

비극의 탄생/ 자기비판의 시도 3장

by 아란도



3장(책세상/p12:24~14:10)


《비극의 탄생》이 나온 16년이 지난 그때의 니체에게 ‘비극의 탄생’을 쓰라고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니체는 고백한다. 비극의 탄생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자기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그 자신의 그때의 문체와 논리적 명료성에의 의지 부족과 지나친 확신을 통하여 증명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증병의 적절성 자체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고 있었다”라고 회고한다. 결국 그때에서의 현재의 니체는 지난 청년의 시절보다 훨씬 문체가 간결해지고 논리적으로 단단해졌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니체는 이 책을 다시 보며 ‘이불 킥’을 좀 했던 모양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비극의 탄생》에 쓰인 문체와 리듬에 대해 니체는 그 자신의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청년(26세) 니체 그 자신에 대한 불만족, 혈기 왕성한 청년의 질풍노도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청년기에 대해서.




1878년에 출간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는 니체가 34세였을 때 출간한 책이다. 이 책의 ‘271장 p163 /모든 철학은 연령의 철학이다’를 옮겨 보았다. 34세의 니체는 26세의 니체보다 정신적으로도 정서적으로 한층 완숙해지고 있었던 거 같다. 한편으론 이 광경이 상상되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즐거운 웃음이다.


“어떤 철학자가 자신의 학설을 발견했을 때의 연령은 그 학설에서 울려 나온다. 그는 시간을 초월해 있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그것을 감출 수는 없다. 쇼펜하우어의 철학도 이렇게 뜨겁고 또한 우울했던 청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나이 든 사람에게 맞는 사유 방식이 아니다. 또한 플라톤의 철학은 찬 기류와 더운 기류가 잇달아 불어 닥치는 경향이 있는 삼십 대 중반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거기에는 먼지와 부드러운 구름이 생겨나고 적절한 상황과 햇빛 속에서는 매혹적인 무지개가 생겨나기도 한다.”






계속하여 《비극의 탄생》 제1부 ‘자기비판의 시도 3장’ 본문을 이어가자면 이러하다.


1)

“이 책은 전문가를 위한 책, 즉 음악의 세례를 받고 처음부터 희귀한 공통의 예술 경험들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이며, 예술의 혈족관계를 보여주는 인식표다. 이 책은 처음부터 ‘민중’보다 ‘교양인’을 더 꺼리는 교만하고 열광적인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끼친 영향이 증명한 바 있고 또 지금도 증명해 주는 것처럼, 이 책은 함께 열광할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를 ‘새로운 샛길’과 ‘무도회장’으로 인도하기에 충분하며 이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새로운 샛길과 무도회장은 은유적 표현이다. 결국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이 말을 알아먹는다. 가보지 않은 길로 가야 한다는 것과 가보지 않은 길은 곧 낯선 세계로의 초대이다. 가보지 않은 그 샛길은 바로 꿈의 궁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즉 마법적으로 보이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법이 아니며, 인간은 그런 기능을 이미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은폐되어 있는 어떤 것을 볼 수 있는 방식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그것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나는 니체가 말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중첩’이라고 생각한다. 겹쳐져 있는 것이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과 가상은 서로 중첩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의 현상에서 다른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발견은 우리의 ‘상상’ 또는 ‘정신적인 경험’처럼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그것이 어쩌면 세계의 본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본문에서 ‘민중보다 교양인을 더 꺼린다’고 표현한 니체의 말은, 니체가 민중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있음이기도 하며, 게다가 교양인은 ‘더’ 꺼린다고 하는 표현은, 니체가 본 교양인은 속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가 보는 민중에 대한 입장은 아무래도《선악의 저편》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저서 《반시대적 고찰》에서는 왜 교양인이 속물인가? 에 대해서 세세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교양인은 분명 어떤 것에 대해서 어긋난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인가? ‘말’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 1》에서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고백서(니체가 ‘고백서’라고 써 놓았다)의 문장들을 인용하여 ‘비문’에 대해서 조목조목 지적을 한다. 말의 성립이 안 된 문장들에 대해 니체는 경멸을 표한 것이다. 그리고 슈트라우스적인 문체에 대해서 니체는 ‘속물’적이라고 생각한다.


“ 이 속물 문화 자체가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진짜와 가짜, 독창적인 것과 모방한 것, 신과 우상을 구별하는 법을 잊어버렸으며, 그리고 현실적이고 정당한 것에 대한 건강하고 남자다운 본능이 이 문화에서 상실되어 버렸다고. 속물 문화는 몰락을 자초했다. 지금 이미 그 문화의 지배권의 표시는 줄어들고 있으며, 그것이 걸쳤던 ‘자포紫袍’는 떨어지고 있다. 자포가 떨어지면, 그것을 입는 공작도 뒤이어 떨어져야만 한다.” <반시대적 고찰 p282~283>



언제나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가르는 아슬한 순간은 미추가 동시에 공존할 때이다.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 1》에서 ‘슈트라우스적 속물’ 유형을 고발하고 있다. 어쩌면 《반시대적 고찰》은 ‘비평문’ 포문을 열었던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나의 대상을 상정한 ‘리뷰review’로서의 비평철학은 철학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속물 유형’을 고발하는 것에서 보자면, 니체가 문법을 상당히 중요 시 했음을 알 수 있다. 니체는 독일어 문법을 해치는 ‘비문非文’ 사용을 극도로 경멸하였던 것 같다. 그 당시에서 당대의 독일을 무척이나 비판하던 니체였지만, 독일어 문법을 해치는 글들을 보는 것은 괴로웠던 모양이다.


한편으로 ‘자포紫袍’는 귀족의 상징이다. 보라색은 고대로부터 귀족의 색이다. 이 말은 귀족이 속물화되면 그만큼 입지는 좁아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락이자 하강이며 몰락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381장 p205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방 ━ 저속한 것은 모방으로 명성을 얻고, 훌륭한 것은 그것의 모방으로 명성을 잃는다. 특히 예술의 세계에서 그러하다.”



《반시대적 고찰》에서 ‘속물적인 특성’에 관한 비근한 예시 중에서, 글이 길어지므로 예시는 제외하고, 니체가 그의 생각을 밝힌 부분들만 모아서 옮겨 본다.


- 두 문장 구성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은 단정치 못한 자의 표시다.
- ‘분명하다’와 ‘노출하다’의 수치스러운 혼동. 이러한 언어 개혁자는 어린 학생처럼 벌을 받아야만 한다.
- 주의 깊은 저술가는 독자를 의심스러운 상태로 내버려 두거나 잘못 인도하는 일을 무엇보다 두려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비유는 어떤 것을 더욱 명료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비유 자체가 불명료하게 표현되어 미혹시킨다면, 비유가 없을 때보다 더 사태를 애매하게 만들 것이다.
- 이처럼 통속적이지 않은 사태에서 이와 같이 통속적으로 장사꾼처럼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자신이 평생 동안 정말 나쁜 책만 읽어왔다는 것을 드러낸다. 슈트라우스의 문체는 도처에서 나쁜 독서를 입증하고 있다.
- 아무도 그렇게 글을 써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유명한 산문 작가라면, 더더욱 그렇게 써서는 안 된다.
- 언어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아서 자손에게 남기는 상속 재산이며, 신성하고, 귀중하고, 훼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대하듯 언어에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나이 든 사람이라면 알고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당신들의 귀가 둔해졌다면, 질문하고 사전을 찾아보고 좋은 문법서를 사용하라.
- 그가 써놓은 것은 룸펜의 언어다. 이렇게 문체상으로 둔감한 사람이 신조어나 변형된 옛 단어들 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자신이 마치 제바스티안 프랑크인 것처럼, “평준화하는 사회민주주의 의미(슈트라우스 고백서 279쪽)에 관하여 말할 때, 혹은 한스 작스의 표현법을 모방할 때, 그는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
- 슈트라우스는 닳아 떨어진 자신의 현대적 표현 한가운데서 이와 같은 고대의 헝겊 조각이 왜 그렇게 눈에 띄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런 표현법과 그런 헝겊 조각이 표절된 것임을 눈치 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복 수선공은 여기저기서 창조적이기도 해서, 새로운 낱말을 생각해내기도 한다.
- 무모한 언어 예술가여! 이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나는 여기서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유비도 나에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림 형제도 이런 종류의 ‘인사’를 건네받고는 무덤처럼 침묵한다. 당신은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끔찍한 무지로 인하여 다시 한번 전치사들을 혼동한 것이다. ‘표현하다aussprechen’를 ‘말을 걸다ansprechen’로 혼동하는 것은 상스러움의 낙인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공공연하게 표현하다는 사실이 설령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당신의 청각은 나쁘거나 이상하다.
- 얼마나 상습적으로 말라비틀어진 문체인가!
-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3격을 4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오류이고, 모범적 산문 작가에게는 범죄가 된다.
- 이러한 동어 반복의 어처구니없는 불합리가 실제로 잉크병에서 종이 위로 숨어들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을 인쇄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겠는가? 교정할 때 그런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6판씩이나 교정하는데도!






계속하여 '자기비판의 시도' 3장 본문을 이어가자면 이러하다.


2)

“하나의 낯선 목소리가 말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 한 때 학자의 두건 아래, 독일인의 무거움과 변증법적 무뚝뚝함 아래, 심지어 바그너주의자들의 무례한 태도 속에 자신을 감추었던 신의 사도가 말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아직 이름이 없는 ‘낯선 욕구’를 가진 ‘어떤 정신’이 있었다. 디오니소스라는 이름이 하나의 물음표처럼 붙어 있는 물음들, 경험들, 비밀들로 충만한 기억이 있었다.
여기서는 신비하고 거의 바코스의 무녀 ‘마이데이스의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이 말했다. 이 영혼은 힘겹게 제멋대로, 스스로를 알릴 것인가 은폐할 것인가에 관해서도 거의 결정하지 못하고, 마치 외국어로 말하는 것처럼 떠듬거리다. 이 새로운 영혼은 노래했어야 했다. “


니체는 여기서도 자기비판을 시도한다.

“말하지 말고! 내가 그때 말해야 했던 것을 과감하게 시인으로서 표현하지 못한 것은 얼마나 유감스러운가. 나는 아마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니체는 문헌학자로서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이 분야에서 문헌 학자에게는 거의 모든 것이 발견되고 발굴되어야 하는 것으로 남아 있다! 발견되고 발굴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여기 하나의 문제가 놓여 있다는 사실문의 문제, 즉 우리가 ‘무엇이 디오니소스적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한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전혀 인식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는 사실의 문제다.”


니체가 말하지 말고 ‘노래’했어야 했다는 말은 시인의 영감으로 ‘시적’으로 표현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는 곧 노래이니까! 말이다. ‘무엇이 디오니소스적인가?’라는 물음은 곧 시적인 은율, 즉 노래이자 음악인 비극인 것이다. 니체는 그의 다수의 책에 시로써 어떤 상태의 감정을 표현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시 그러니까 운문적이고 음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니체는 이때의 유감스러움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서 완전히 해소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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