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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결산

짧은 생각들

by 김알옹

7월엔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 외국계 제약회사들은 조금만 회사가(정확히는 본사가) 어려워지면 전 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돌리거나 조금이라도 정리할 수 있는 포지션들은 바로 없애버린다. 이번엔 내가 속한 조직에 폭풍이 몰려왔다. 내 팀원과 옆 팀 사람이 대상이 된 것이다.


포지션 자체가 정리되는 거라 충원이 없고, 대신 일부 업무들을 센터로 넘겨준다. 팀 업무들을 일괄 옷장 정리하듯 싹 다 꺼내서 펴놓고 뭘 남기고 뭘 넘길지 확인한다. 그 와중에 나가는 분 챙기면서 그분 업무도 인계받는다. 내 업무조차도 변동이 생기고 심지어 보고라인까지 한국인 보스에서 외국인 보스로 바뀐다. 기존 한국인 보스도 옆자리에 그대로 남아있기에 시어머니가 한 명 추가되는 셈이다.


일상적인 스트레스는 집에 와서 밤에 책을 읽으면 좀 풀리는 편인데, 이번 건은 좀 강력해서 도통 책이 손에 잘 안 잡힌다. 언제 안정화되려나...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그래도 읽은 책들이 조금은 있으니 정리는 해둬야지.





황석희 <오역하는 말들>

영화 자막 번역 분야에서 실력 좋기로 유명한 황석희님의 에세이. 말을 다루는 사람이라 그런지 생각이 말로 잘 정리된 글들이다. '와 글 잘 쓴다!'라고 감탄하며 읽었는데, 작가님 본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번역자로서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의미를 이해하도록 번역문을 써 온 게 20년이다. 시간이라는 물리적 제약이 있는 영상을 주로 번역했기에 더 그런 성향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럴까. 내 글도 다소 직관적이다. 당연히도 내 글은 내 번역을 닮았다.
"글이 잘 읽힌다." "술술 읽힌다." 등의 표현을 자주 들었다. 자막을 20년 써 왔으니 나는 글말이 아니라 입말을 쓰는 번역을 20년간 해 온 셈이다. 그래서 내 글은 텍스트의 형태임에도 글말보다 입말에 가깝다. 조사나 어미의 연결과 흐름에 집중하는 입말, 아마 그래서 잘 읽힌다는 말을 듣는 걸 거다. 그걸 책을 내고서야 알았다. 그게 내 글의 강점이기도 하고 관점에 따라선 약점이기도 하다. 그렇게 쓱 읽히는 글은 잠시 멈춰 숙고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런 요소는 때에 따라 독자 경험에 해가 되기도 한다.


어쩐지 술술 읽히더라... 저같이 빠르게 멈추지 않고 읽는 독자에겐 작가님 글이 최고랍니다.


글 중에 소개되는 <파친코>의 자막 번역 결과물을 보면, 이 번역가 선생님이 얼마나 뛰어난 역량을 가진 분인지 알 수 있다. 애플tv에서 드라마를 봤을 때는 이 작품이 소설 원작이라는 것도 모른 채로 시작했다. 보면서 대사가 어쩜 저렇게 경상도 방언을 쓰면서도 감정 전달을 잘하는지 신기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민진 작가님이 영어로 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든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영어가 한국어를 거쳐 경상도 방언까지 도달하면서 그 의미가 점점 더 잘 살아나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을 건데, 그 일을 황선생님이 해낸 것이다.


"Three bowls. Perhaps the taste of it will swallow some of your sorrow as well."
직역: "세 사발이다. 어쩌면 이것의 맛이 너의 슬픔도 어느 정도 삼킬 것이다."
실제 대사: "세 홉이데이. 선자 어매도 무믄서 설움 쪼매 삼키라이."


황석희님의 대표작: 맨 정신으로 번역 가능한지 궁금한 데드풀 자막 (출처: 20세기 폭스 코리아)


나중엔 도움까지 얻음 ㅋㅋㅋㅋㅋ (출처: 작가님 본인 페이스북)





이낙준 <닥터프렌즈의 구사일생 세계사>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 골든 아워>의 원작은 웹소설이다. 웹툰으로 이어졌고 책으로도 발간됐다. 무려 15권이나 되는 책을 무협지 읽듯 빠르게 독파해 나가며 즐거웠던 기억이 있는데, 나중에 넷플릭스로 인기를 얻는 걸 보고 홍대병 환자처럼 ‘으 이거 나만 알던 작품인데!’ 라며 사람들한테 주책맞게 “이거 원작은 (웹)소설인데 난 15권을 다 읽었다우“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그 작가님은 이비인후과 의사 이낙준(필명은 한산이가)님이다. 원래 닥터프렌즈 유튜버이자 의사이자 웹소설작가로 쓰리잡을 돌렸지만, 이젠 진료를 보지 않고 웹소설에 집중한다고 한다. 그게 돈이 가장 많이 벌린다고 한다. (네이버 웹툰으로 돌아가는 작품만 현재 기준으로 네 개다.) 브런치에서 알게 된 어떤 의사분이 중증외상센터 드라마가 의학적 고증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고 쓴 글이 있어서 구독까지 했는데, 일반인의 눈에 그저 재미만 있으면 되니 무슨 상관이랴.


아, 그래서 책은 다양한 질환의 역사를 쉬운 내용으로 다룬다. 쓰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면 이렇게 틈을 내서 책까지 내는 것일까. 대단한 분이다.




김동식, 서수진, 예소연, 윤치규, 이은규, 조승리, 황모과, 황시운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장강명 작가님이 결성한 '월급사실주의'동인에서 나온 세 번째 작품집. 이전에 나왔던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을 재미있게 읽어서 올해도 가져와 읽었다. 예소연 작가님 작품이 있어서 더 관심이 생기기도 했고.


그냥 평범한 사무직 월급쟁이 입장에서 다른 노동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고 있는지(조금 극단적인 케이스들이 많지만) 들여다볼 수 있는 소설들이라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김동식 작가님은 온라인게임에서 노가다를 통해 소액의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쌀먹'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렸고(이분은 정말 공장처럼 소설을 찍어내는 분이다), 서수진 작가님은 호주 마트에서 Politically Correctness를 기대하며 열심히 일하다가 은근한 인종차별을 당하는 모습을, 예소연 작가님은 노인 돌봄 노동에서 돌봄 대상자와의 거리를 얼마나 두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을, 윤치규 작가님은 회사 내에서 차별받는 비정규직 내부에서도 또 다른 차별이 존재하는 부조리를, 이은규 작가님은 사명감을 갖고 탐사보도에 몸을 던졌지만 보도할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운 PD의 모습을(작가님 본인이 PD였다고 한다), 조승리 작가님은 자신의 시각장애인 안마사 경험을 그대로 녹인 차별의 경험을, 황시운 작가님은 하반신 마비로 집에서만 일하는 사람의 처참한 생활을 보여준다. (7년 동안 학원 강사 하면서 쓴 소설이 상을 받아 등단하게 된 날 돌다리에서 추락해 흉추 골절로 하반신 마비가 된 작가님이다.)


이렇게까지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 여전히 사회에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지만 그분들을 위해 뭔가 하는 일은 단지 괜찮은 정책을 가진 정당에게 투표하는 정도... 그거라도 생각하며 하는 게 어디냐고 자위할 뿐이다.




이남 <봉준호 영화들>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는 한국인 평론가가 쓴 봉준호 영화들의 분석. ‘박찬욱은 철학적이고 봉준호는 사회학적이다’라고 할 만큼 봉준호의 영화들은 시대를 반영한 비판과 사회상이 담겨있다. 두 감독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서 행운이다. 그런데 비평가들이 쓴 문장들은 왜 이렇게 안 읽히지...?




강화길 <치유의 빛>

젊은 시절 만났던 몇몇 여자들은 나에게 마음을 열며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줬다.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무슨 계기로 인해 어떻게 멀어졌는지 아주 자세한 서사와 폭발하는 감정을 곁들여 몇 시간이고 말했다. 울면서 말하기도 했다. 사실 한 번 듣고는 기억하기 어려운 정말 재미없는 이야기들이었고 난 “응.. 그래… 그랬구나… 저런… 아이고…”를 반복하기만 했다. 그렇게 어린 여자애 둘이 절교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나면 마치 내가 가장 큰 비밀을 알게 된 사람처럼 급격히 마음의 거리를 좁혀가며 다가오는 여자들을 난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소설을 읽고 난 기분이 딱 그렇다. 관심 없는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듣고 나서 ’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라는 의문을 가졌던 그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아 정말 재미없는 소설이다.




최재영 <맨투맨>

'이것이야말로 MZ의 소설이구나'


문단에 그리 많지 않은 30대 초반의 남성 작가의 소설이다. 첫 소설 이후 6년 만에 나온 작품인데, 그동안 작가님은 영화 일을 했다고 한다. (인터뷰) 영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느낌이라면 소설은 작가가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들 던지는 느낌이라는 작가님의 말과 그동안 해왔던 영화 일에서의 경험이 투영된 듯, 이 작품은 '맨투맨'이라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두 주인공이 등장하며 두 주인공의 '글 잘 쓰는' 또 다른 자아가 각각 등장한다. 조금 황당하긴 하지만 주인공뿐 아니라 주변 인물 모두가 자기 캐릭터가 확실하고 재미있는 문장이 쉬지 않고 나와서 피식피식 웃으며 읽었다.


작중 주인공이 좋아해서 자기 시나리오에도 영향을 많이 끼친 영화 <록키>


신선하고 재미있지만 결말은 실망스럽다. 우연인지 몰라도 작중 주인공들이 작업하는 시나리오도 결말이 실망스럽다. 이것도 작가의 설계인가?



재미있는 문장이 워낙 많이 몇 단락 가져와본다.


'존나 존나게'에서 안도감을 느끼다니 범상치 않은 젊은이다. 가끔 소설가들이 비속어를 자신의 작품에 삽입하는 걸 보면 그 한 단어를 쓰려고 굉장히 고심한 흔적이 보일 때가 많은데, 이 작가님은 가차 없다.

"그럼 돈 벌고 싶은 거예요?"
"네, 돈 벌어야죠."
"많이?"
"네."
"존나?"
"존나 존나게 벌 거예요."

‘존나 존나게’라니. 문득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행이야, 이러면. 괜찮지. 그래.


존나 존나게 잘 꼬집는 작가님. 어쩜 저렇게 극과 극의 스타일인 두 수상집을 정확히 잘 표현할까. 내가 말하고 싶은 딱 그 느낌이다.

"요즘도 가끔 소설 써?"
옥빛 누나와 골뱅이 소면에 소주 한잔을 하던 중, 내가 물었다. 선셋 작가 관련 일로 다시 연락하게 된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종종 만났다.
"아니. 근데 가끔 읽기는 해."
"아, 그래? 아직도 문학을 사랑하시는군. 그럼 어떤 거 읽어?"
"그때그때 다르지."
옥빛 누나는 취기로 발그레한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 기분이 오늘따라 누군가를 조소하고 비웃고 싶으면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읽고, 허망하게 망해 가는 뭔가를 볼 때의 허무한 기분을 느끼고 싶으면 이상문학상 수상집 같은 거 읽고."


이건 요즘 내 인생(커리어랄까) 이야기 같아서...

카페에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은 대체로 평화로웠지만 이따금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문득 내가 고장 난 잠수함에 탑승해 있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수면 위로 올라가지 못한다. 빠져나오기는 이미 늦었다. 잠수함 밖은, 빛이라곤 없는 어둠의 심해. 다만 너무도 천천히 그리고 평화롭게 가라앉는 중이라 나는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조차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한테 최대한 "넌 xx처럼 해야 해 / 넌 xx처럼 저러면 안 돼"와 같이 누군가와 비교해서 가치를 심어주는 일을 최대한 멀리하고 있다. 그냥 이건 옳은 일이고 이건 옳지 않은 일이며 이건 해야 하는 일이고 이건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해줘도 충분할 것을 우리는 굳이 남을 끼워 넣어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주거나 스스로 우월감을 느낀다.

세상엔 두 종류의 스승이 있다. 먼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지 알려 주는 스승이 있다. 우리는 대개 그런 스승만을 스승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상엔 자기 인생을 희생함으로써 가르침을 주는 그런 스승도 있다. 자신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 어떻게 하면 성공해서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만은 잘 알겠군! 하는 식의 깨달음을 주는 스승. 어둠의 스승. 치성이 형이 바로 그랬다.
치성이 형의 훈련장이자 일터인 MMA 체육관은 버스로 30분쯤 가야 있었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맨 뒷좌석에 선셋 작가와 나란히 앉은 나는, 왠지 아버지를 죽이러 가는 오이디푸스가 된 심정이었다.




박대겸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

라멘집에서 알바하는 탁구동아리 소속 20세 대학생이 평행우주로 간 전남친의 도움을 받아 '파동 입자'가 되어 외계인을 물리친다. <삼체>를 읽었더니 웬만한 외계인의 지구 침략 이야기는 그저 코웃음만 나온다.




류선규, 홍석만 <야구 x 수학>

6월 말쯤 넷플릭스에서 영화 <머니볼>이 내려간다는 소식에 다시 한번 감상했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빌리 빈은 스몰마켓인 팀 사정 상 비싼 선수를 사서 쓸 수가 없어서 저평가된 좋은 선수를 사 와서 팀을 꾸려 강팀을 만든다. 이때 가장 높은 비중을 둔 스탯은 출루율이었다. 홈런을 못 쳐도 선구안이 좋아 볼넷을 잘 골라내는 선수들을 모으는 것이다. 그렇게 성공했지만 빌리 빈의 오클랜드는 월드시리즈 우승까지는 못했다. 정규시즌은 162게임이나 하니까 정규분포에 수렴하지만 포스트시즌은 운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러고 보니 <머니볼>의 원작 책도 책꽂이에 꽂혀 있다.


정규분포 하니 통계학이 생각나는데, 야구는 이렇게 많은 경기를 치르면서 쌓이는 통계를 활용하면 의미 있는 분석이 가능하다. 야구는 하나도 모르는데 아이비리그 출신의 월스트리트 투자은행에서 일하던 사람이 야구팀에 와서 분석가로 일한다.


이렇게 말하면 야구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야구팬들이 뭔가 굉장히 분석적이고 냉철하게 경기를 본다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아니올시다. 매 경기, 아니 매 이닝, 아니 스윙이나 공 하나하나 보면서 엄청나게 일희일비하는 게 보통의 야구팬이다.


야구팬들은 언제나 화가 나있지.


그래도 아는 만큼 보인다고, 기본적인 야구 통계 지식을 좀 갖추면 야구를 더 즐길 수 있다... 고 믿는다. (사실 아는 만큼 더 화가 나고 욕을 한다)


그래서 도서관 서가에 꽂힌 야구 책을 하나 집어왔다. 전 SSG 랜더스 단장인 류선규 님과 수학교사인 홍석만 님이 쓴 야구 책이다. 류선규 님은 무려 LG의 유광잠바를 기획했던 분으로, SK 와이번스-SSG 랜더스에서 20년을 일하며 단장까지 올라가며 수많은 우승을 경험했던 명 단장이다. 2022년 SSG 랜더스 우승 후 퇴임해서 지금은 재야의 야구 고수로 살고 계신다고 한다. 이렇게 책도 쓰시고.

(드라마 <스토브리그>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야구에서 단장의 역할은 감독의 그것보다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감독은 단장이 데려온 선수를 필드에서 잘 활용할 뿐, 팀의 구성은 전적으로 단장의 책임이다.)


야구가 워낙 숫자를 많이 쓰니까 필드/실무와 숫자를 결합한 책의 취지는 참 좋다. '야구'파트는 참 재미있는데 '수학'파트로 가면 가독성이 확 떨어진다. 실제 수학을 수식과 숫자로 잔뜩 설명해 놨는데, 너무 수학에 몰두한 나머지 자꾸 야구에서 벗어나는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다. 그래도 야구 파트에서 단장의 시각으로 스탯 분석뿐 아니라 경기 외적인 부분까지 모두 다루고 있어서 야구 부분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다.




최정화 <호르몬 체인지>

도입부터 충격적인 설정으로 기대감을 잔뜩 끌어올려놓는다. 의학의 발달로 젊은 사람이(셀러) 노인에게(바이어) 호르몬을 주면 바이어가 셀러의 나이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셀러는 2-3주 동안 아예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크게 앓고 난 이후에도 계속 바닥인 건강상태로 살아야 한다. 셀러는 바이어에게 큰돈을 주기 때문에, 바이어는 보통 빈곤층 청년들이 지원한다. 사회는 노인을 멸시한다.


어 이거... 살짝 영화 <서브스턴스>랑 비슷한 설정인데? <서브스턴스>는 약을 섭취하자 자신의 몸에서 등을 가르고(문자 그대로) 젊은 자신이 등장해서 늙은 자신과 교대로 사흘~일주일로 생활하는 설정이다. 젊음을 간절히 원하는 늙은 자신의 강렬한 욕망이 젊은 자신을 태어나게 하지만, 결국 젊은 자신을 질투하는 늙은 자신과 늙은 자신을 혐오하는 젊은 자신의 대결로 구도를 설정한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마셰티>의 로버트 로드리게스 영화 같은 스타일로 피와 살점과 폭력이 난무한다.


너의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라는 말도 있잖냐 (사진출처: 워킹타이틀 필름)


다시 책으로 돌아오면, 바이어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셀러의 사연으로 넘어가고 상담실장의 사연으로 넘어가는 등 이야기가 무르익을 새가 없다. 충분히 재미있는 소재라 좀 더 길게 서술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등장인물 한 명마다 챕터를 하나씩 할애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조는 하나의 큰 이야기 흐름을 여러 인물들이 쌓아 올려 만들어나가는 목적이었을 것 같은데, 이야기의 깊이가 부족하고 등장인물이 점점 많아지면서 산만해진다. (꽤 비중이 있어 보였던 책 초반에 등장한 바이어가 그냥 갑자기 죽어서 사라지는 식으로) 막판엔 대체 이걸 왜 읽고 있나 스스로에게 물으며 억지로 책장을 끝까지 넘겼다. 주제가 아무리 좋아도 구성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이 확 달라질 수 있다고 느꼈다.



이런 옴니버스 구성의 (내가 읽은) 최고봉은 정세랑 작가님의 <피프티 피플>이다. 50명이 등장하지만 그 어느 인물도 이야기의 흐름에 방해되지 않는다.




레이 커즈와일 <마침내 특이점이 시작된다>

AI와 함께하는 미래: 희망편




배명훈 <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작가님의 소설은 처음 읽어본다. 북방 아시아의 어느 이름 모를 유목민들의 국가가 배경인 듯한데, 역시 아무 능력도 없는 평범한 주인공이 자신의 노력과 특별한 인연과 능력 있는 조력자를 만나 영웅으로 성장하는 서사는 실패하지 않는다. 보통의 무협지나 SF보다 더 읽는 맛이 좋다.




정희원 <저속노화 마인드셋>

렌틸콩 전도사 정희원 선생님의 새 책. 술을 잘 놓지 못한다는 고백과 호른을 분다는(가장 큰 목관악기) 자랑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난 가속도 저속도 아닌 정속노화 중인 것 같다. 달리기를 좀 더 하고 싶은데 무릎이 썩 좋지 않다. 식사는 섬유질을 좀 더 많이 먹고 과자를 줄여야 한다. 독서와 독서노트 작성으로 스트레스가 많이 풀리는 건 도움이 된다.


정희원 선생님은 최근에 서울아산병원 교수직에서 내려와 서울시 건강총괄관에 위촉됐다. MBC 라디오 DJ로 데뷔해 건강 정보를 알리기도 한다. 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에게 3분진료 하면서 느낀 아쉬움을 이런 식으로 해결해 보려는 것 같다. 수백만명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직접 설계하고 실행하면서 많은 어려움도 맞닥뜨리겠지만 그 의지를 끝까지 굳게 밀고 나가시길 응원한다.


다음은 인터뷰 (출처: '저속노화 의사' 정희원, 병원 퇴사 뒤 서울시 국장급 된 까닭 | 중앙일보)


Q>왜 대학교수 자리를 버리고 자문관이 됐나.

A>저속노화를 주장했지만, 국민의 건강 지표가 잘 나아지지 않는다. 저속노화의 실천이 저속으로 나아간다는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정책으로 만들어 실천해서 크게 영향력을 미쳐 여러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건강 행태를 크고 넓게 변화시키고 싶다.


Q>왜 보건복지부가 아니라 서울시를 택했느냐.

A>보건복지부는 업무가 여러 과로 쪼개서 있다. '호치키스 노동'(업무량이 많거나 반복적인 단순 작업을 의미)처럼 보인다. 자리가 자주 바뀌어 새 부가가치를 만드는 일을 잘 못 하더라. 조직이 작고 빠르게 움직이는 데가 좋은데, 그게 서울시라고 판단했다.

Q>뭘 할 건가.

A>고속 정책을 하려 한다. 음식의 포트폴리오를 건강해지게 만드는 게 목표다.


Q>예를 들자면.

A>가능하면 소아·청소년의 당분과 초가공식품 섭취를 줄이기 위해 넛지 정책을 도입하려 한다(넛지 정책은 팔꿈치로 슬쩍 찌르듯 부드럽게 개입해 선택을 유도하는 것). 초가공식품이 아이들 눈높이보다 훨씬 높은 곳, 손이 안 닿는 곳에 진열하도록 유도하는 식이다.


Q>다른 방법은 없나.

A>비행기 타면 승무원이 콜라·주스 등의 설탕 음료를 제시하는데, 물이나 당분 제로 음료를 같이 제안하게 바꿔야 한다. 식당에서 추가 요금을 내더라도 잡곡밥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 은근히 압박하면 가능해질 것이다. 궁극적으로 금전적 유인을 줘야 하겠지만.


정 전 교수는 "먹고 마시는 운동장이 달고 기름지고 짠 음식으로 기울어져 있고, 그래야만 승리하는 구조이다. 그래서 비만해지고, 노쇠가 빨라진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고 싶다"고 말했다.


정 전 교수는 서울을 압력밥솥에 비유한다. 언제 터질지 모른다. 녹지를 늘리고, 걷기 쉽게 하고, 이동을 편하게 해서 압력을 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서울시는 다른 시·도보다 고령화율이 낮고, 돈(재정)이 많다. 압력을 빼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서울이 모범적인 정책을 치고 나가면 다른 데서 따라올 것"이라고 말한다.




오시로 고가니 <해변의 스토브>

소복소복 내리는 눈 그림에 이끌려 빌려온 일본 작가의 만화. 여름에 나타난 설녀, 연인과의 이별로 슬퍼하는 남자에게 말을 거는 난로, 불의의 사고로 투명인간이 된 남편과 곁에 있지만 그를 그리워하는 아내, 죽은 지인을 그리워하며 눈 속을 걷는 남녀 등 특이한 소재와 차분한 그림체로 독자들의 감성을 어루만진다. 감성이 메마른 편인 나도 읽으면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코타츠 안에서 귤을 까먹는 듯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강보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이쪽’과 ‘저쪽’을 나눠놓고(주로 예술과 통속 사이를 오간다), 그 안에서 인물 간의 갈등을 고조시키다가 막판에 억지로 화해시키는 구조가 작품마다 반복된다. 화자는 주로 ‘이쪽’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서술한다. 마치 자신들이 피해자인 양, 은혜를 베풀 듯 화해한다.


‘그래 내가 더 고고한 존재니까 화해해 줄게. 근데 그 화해도 내 마음속에서 혼자 하는 거임’


재미도 없고 읽기 몹시 불편했던 나는 ‘저쪽’에 속한 사람인가 보다.




박이강 <잡 인터뷰>

도서관에서 아이 숙제 시키는 동안 옆에 앉아서 잠시 읽은 위픽 단편. 외국계 회사의 인터뷰를 보러 간 주인공은 전형적인 한국의 직장인이다. 자신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진 면접관이 (심지어 나이도 더 어린) 등장해서 주인공의 내면을 휘젓는데, 결국 그 면접관도 회사의 도구일 뿐이었다.


몇 번의 이직을 거치면서 한국 기업/외국계 기업 가리지 않고 면접자 입장에서 다양한 면접을 겪어봤고, 몸담고 있던 회사들에서 면접관으로도 여러 면접자를 겪어봤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한 시간 남짓 대화하며 이토록 확연히 계층이 나뉘어 폭력적인 질문을 퍼붓는 관계가 또 어디에 있을까? 내가 면접관일 때는 워낙 공격적으로 질문 구조를 짜와서 면접자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얼굴이 빨개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평소 업무할 때는 안 그러는데 면접 자리에서는 꼭 사람이 그렇게 된다. 마치 역할실험 하는 것처럼. 회사 일을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을 뽑아서 어떻게 성장시키고 활용하는지가 팀의 흥망을 좌우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깐깐하게 사람을 검증하겠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경험이다.


박이강 작가님은 외국계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등단한 분이다. 역시 장르소설이 아닌 이상 작가 자신의 경험이 이야기를 만들기 가장 쉬운 소재인 것 같아서 난 소설가는 못 되겠다. 장르소설을 쓰기엔 상상력이 빈약하고, 내 이야기는 아무도 관심 가질 만한 소재가 없다.




김지연, 이서아, 함윤이 <소설 보다 : 여름 2025>

셋 중 한 편은 재미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사서 읽는 소설 보다 시리즈. 7월 말에 짧게 여행을 가면서 비행기에서 읽었다.


김지연 작가님의 <무덤을 보살피다>는 짧은 분량에 3대로 이어지는 가족사가 펼쳐져 있는데, 초반엔 스릴러 느낌으로 시작했다가 결국 갈등이 봉합되는 훈훈한 결말로 이어진다. 이서아 작가님의 <방랑파도>는 방랑하는 주인공이 요양원에서 알바를 하며 인근 해변에서 서핑을 배우는 내용인데, 나한텐 별 감흥이 없이 다가왔고, 함윤이 작가님의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는 시골 면사무소에 부임하는 주인공이 지역의 사이비 종교를 믿는 집단을 바라보는 내용인데 역시 별 감흥이 없었다.


이번 호는 셋 다 재미가 없던 걸로... 가을을 기다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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