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들
10월에 읽은 책들입니다. 간단히 정리해 봤습니다.
9월: 2024년 9월 결산
임소미 <요즘 어른들을 위한 최소한의 한국사>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생각은 누구나의 가슴속에 있지만, 그 역사가 개인의 일상까지 흘러오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모습에 현재를 비춰보는 일은 중요하다.
이 책은 치우침 없이 딱 필요한 기록만 있어서 쉽게 읽히는 한국사 개괄서이다. 고조선부터 조선의 패망까지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함께 빌린 최태성쌤의 <최소한의 한국사>와 비교해서 읽어볼 것이다.
전하영 <시차와 시대착오>
전하영 작가의 단편 모음집. 영화판에 있다가 등단한 분이라 그런가 작품마다 예술가가 한 명씩 등장한다.
그런데 <검은 일기>라는 첫 작품이 1080도 비틀어져 있다. 결말이 확실하고 강한 메시지를 남기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등장인물 모두의 정체를 모두 물음표로 남겨놓는다. 작가가 손으로 가려놓고 종이에 정체를 쓰고는 서둘러 지우개로 지우면서 끝나는 느낌. 아 짜증……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라는 작품은 ‘파트너에 비해 턱없이 좋지 않은 시력과 가뭄의 논밭처럼 갈라진 회복 불가능한 발뒤꿈치와 눈에 띄게 희끗희끗해진 음모’에 번민하는 ‘미혼 이모(비공식 이모)’가 다시 삶에 기쁨과 활력을 불어넣어 살고자 하는 희망적 결말에 그나마 좋게 읽었다.
<시차와 시대착오>는 굳이 수미쌍관을 사용한 부녀의 이야기다. 비혼의 여성 예술가가 아버지와 세대차이/젠더갈등을 겪는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잘 읽혔다.
나머지 작품은 잘 읽히지 않아 굳이 기록하지 않는다.
박경리 <일본산고>
30년 전에 쓰신 글들이 아직도 가슴에 와닿는 걸 보면 그때 이후로 일본도 우리나라도 많이 변하지 않았나 보다. 어려운 단어를 많이 쓰셨음에도 잘 읽히는 걸 보면 내가 겪지는 않은 아픔의 역사가 나에게도 조금은 남아있나 보다.
일본인에겐 예를 차릴 필요가 없다.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를 공부해서 과거의 공과 사를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녹여내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요즘, 광복절이나 삼일절과 같이 상징적인 날에 한 번쯤은 읽어봐도 좋을 글들이다.
최태성 <최소한의 한국사>
임소미의 <요즘 어른들을 위한 최소한의 한국사>와 비교해 보려고 읽은 큰별 최태성 쌤의 한국사 개괄서. 역시 고조선시대-삼국시대-후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를 아주 빠르게 훑어본다. 이 책엔 추가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군사정권과 민주화 이후의 이야기까지 짧게 다룬다.
두 책의 논조 차이는 크지 않다. 한 사건마다 논문 하나씩은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을 수십 건씩 사실만 나열하는 수준이라 정말 말 그대로 ‘최소한’의 한국사이다. 치우치지 않고 성인들에게 잊어버린 역사의 흐름을 짚어주기 위한 책의 목적에 충실하다.
남도형 <인생은 파랑>
성우 남도형 님의 에세이.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를 보고 엔딩 크레디트에 ’성우 남도형‘이라고 나와 찾아봤더니 아주 유명한 성우였다. 83년생인데 19년 차 성우이다. 4년 전에 시작한 유튜브는 700개 넘는 영상을 업로드해서 구독자가 50만 명에 육박하고, 19년간 오디오북을 2만 권(!!!!!) 녹음했다고 한다.
이런 엄청난 일중독자의 성우 연기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3대 미키마우스라는…1대는 무려 장광 성우님, 2대는 디카프리오 전담 강수진 성우님이라니 참 영광스러운 역할이다.
그래.. 이렇게 열심히 사시니 결혼을 못하셨지.. ㅠㅠ
자기 목소리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직업. 참 매력적이다.
강윤기 <온에어, 미국은 내전중>
분열된 미국의 모습을 KBS PD특파원인 저자가 그려냈다.
올해 5월에 나온 책인데 그 뒤로 민주당 대선후보가 바뀌는 대사건이 일어나서 읽는 나도, 아마 저자분도 바이든 내용에 좀 머쓱하지 않았을까 ㅎㅎ
민주당 후보가 바뀌어도 이쪽엔 트럼프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책 내용이 계속 유효하다. 사실상 미국의 분열은 트럼프 등장 이후에 가속화됐으니까.
엄청난 빈부격차와 지역 간 격차, 총기, 마약, 젠트리피케이션, 학교폭력, 이민자, 인종차별 등의 다양한 문제가 불거져 나오지만 여전히 초강대국 지위를 잃지 않고 압도적인 총생산과 기술력과 군사규모를 자랑하는 특이한 나라. 국토 면적이 넓고 자원과 인구가 많은 것이 이 나라의 힘의 원천이려나. 아, 달러와 영어.
곧 있을 대선 결과가 궁금하다. 처음 트럼프 당선된 날 마침 미국 출장 중이어서 현지 직원들을 놀려줬던 기억, 그 차가운 늦가을의 공기와 넓은 지평선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데, 그 뒤로 이직을 두 번이나 했다니! 참 세월 빠르다. 그러니까 8년 전이라는 얘기네.
차인표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분노의 양치질만 잘하는 탤런트(TV 드라마에만 출연하는 배우는 왠지 ‘탤런트’라고 불러야 할 것 같잖아)인 줄만 알았던 차인표 님이 알고 보니 소설을 세 권이나 출판한 작가였다니…
초반은 어린이용 동화 느낌이었는데 이야기가 풀려나갈수록 힘이 실리고 다양한 인물들이 잘 살아났다. 백두산 호랑이 관련한 내용은 영화 <대호>나 김주혜 작가의 <작은 땅의 야수들>에서도 다뤄졌지만, 이렇게 잔잔하고 힘 있지만 감성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니 또 다른 맛이 있었다.
거의 20년 전에 쓴 글이 이제야 빛을 보다니 작가님도 몹시 기쁠 것 같다. 티브이에 출연하는 사람 중 몇 안 되는 올곧은 느낌을 주는 분이라 뭐든 잘 되면 좋겠다. 연기든 집필이든 활발한 작품활동 하시길!
노회찬 재단 <나는 얼마짜리입니까>
자활노동자, 타투이스트, 웹툰 작가, 유튜브 크리에이터, 물류센터노동자, 봉제노동자, 프로축구 4부 리그 선수, 게임 엔지니어, 영어 번역가, 성매매 경험 당사자, 화력발전소노동자, 호텔 해고노동자, 기숙학원노동자, 어부, 농업미생물학자, 면세점노동자, 대학생협 사무국장, 도축검사원, 초등학교 사서, 귀촌청년, 대리운전노동자, 소설가, 결혼이주여성, 성소수자 활동가, 초등학교 교장, 비정규직 노동자, 정신장애 동료상담가, 해고 예정 노동자, 이주노조 활동가, 장애인 노동자, 사회복지사, 가족 돌봄 청년, 장애인 재택근무 노동자, 재일동포 3세, 발달장애인 취업지원센터장, 탈북민, 협동농장 농부, 예능작가, 식당노동자, 폐지수집노동자, 캐디, 헤어디자이너, 가사노동자, 한국어 강사, 고객센터 상담노동자, 자동차 영업사원, 농부, 택배사 아르바이트, 간호조무사, 여행사 대표, 출판노동자, 방송작가, 학교급식노동자, 동네서점 대표, 건설노동자, 김용균재단 대표, 홈리스행동 활동가, 독립 공연기획자, 장애인야학 교장, 요양보호사, 배우, 시설지원노동자, 청소노동자, 비영리단체 활동가, 콜센터 상담노동자, 프랑스어 번역가, 공공도서관 사서, 주차노동자, 대리운전노조 활동가, 인디밴드 멤버
김금희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크리스마스 타일>을 읽고 나서 난 앞으로 무조건 이 작가님 편이라고 생각했다. 2018년에 나온 짧은 소설 모음집이 눈에 띄어 금세 읽었다. 조금 날것의 글 느낌이지만 편안했다.
차인표 <시대예보>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의 작가 차인표 님의 2011년 소설. 나고단, 이보출, 박대수 세 남자가 막장으로 흘러가던 인생에서 희망을 찾아 살아나가는 이야기. IMF 시대의 불쌍한 가장들이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세련된 문체는 아니지만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어서 재미있게 읽히는 책.
송길영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시대예보: 호명사회>를 읽기 전에 작가의 전작을 읽어보려고 빌려왔다. 이 글들의 메시지가 모두 와닿았고 이해되지 않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다 맞는 말이라 오히려 마음속에 남는 말이 없을 정도였다.
너무 술술 읽히는 글이 마치 밋밋한 140km/h 직구 같아서 쉽게 배트를 휘두르고 싶지만 아뿔싸 난 동네 야구연습장 100km/h 공도 못 쳐내는 하수다. 역시 보고 읽은 게 많으니까 눈만 높아져서는…
시대를 잘 올라타서 살고 있나 아님 시대에서 아무것도 못 남기며 살고 있나 걱정이 잠깐 됐지만 내일 회사에서 할 일이 많으니 그날 벌어 그날 사는 하루살이의 마음가짐으로 잠이나 푹 자야겠다.
켄 리우 <은랑전>
오래전 읽은 <종이 동물원>의 작가 켄 리우의 단편집. 그동안 <삼체>를 영어로 번역하셨군요! 똑똑한 양반.
넷플릭스 <블랙 미러>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의 향연이다. 어릴 때 헤어진 딸을 재회하여 함께 유적을 탐구하며 관계를 회복하다가 딸을 지키려 자신을 희생하는 우주 고고학자 아버지의 이야기 <메시지>, 일본에 떨어진 원폭은 사실 오키나와 출신 무녀의 후손이 ‘맥스웰의 악마’라는(칸막이가 있는 상자 안에서 공기 분자의 속도 차이를 관측하는 악마가 빠르거나 느린 분자를 각 칸에 모아서 빠른 쪽의 뜨거움과 느린 쪽의 차가움의 차이를 이용해 무제한적인 에너지를 얻는다: 이게 대체 뭐냐 이과놈들아…) 개념을 응용하여 두 혼령을 우라늄 238과 우라늄 235 분자 구분에 활용한 것이라는 이야기 <맥스웰의 악마>, 차원을 갈라 공간을 얻는 능력을 배운 은랑의 이야기 <은랑전>, 총기난사로 희생된 딸을 추모하려고 알고리즘 전문가에게 맡긴 모든 디지털 자료가 반대편의 인터넷 트롤링에서 사용되어 음모론과 딥페이크를 통해 악용되며 결국 추모를 원한 엄마를 무너뜨리는 이야기 <추모와 기도>, 가상현실과 블록체인기술을 통해 지구의 분쟁지역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학살을 실제 체험하는 플랫폼을 개발한 전문가와 이를 이용하여 기부를 늘리려 하는 국제구호기구 담당자인 친구의 이야기 <비잔티움 엠퍼시움> 등 문과생은 집중해서 읽어도 100% 이해하려면 몇 번이고 앞 페이지로 돌아가야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진짜 일어날 수 있는 미래의 이야기를 경계심을 품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