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더믹 첫 일 년을 홍콩 호텔방에서 살았다.

홍콩 - 사잉푼의 한 호텔

by 다정

홍콩에서는 총 반십년 (5년)을 살았는데, 그동안 집만 다섯 군데에 살았다. 생각해보니 홍콩에서 일 년을 넘게 산 집이 없는 셈이다. 형태도, 위치도 다양했다. 일관된 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레가 들게 할 만한 월세뿐! 그중 하나는 아주 그로테스크한 범죄가 일어난 건물에서 불과 두 블록 거리의 집이었다. 내가 일상의 평온을 누리던 동네에서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에 잔혹한 범죄가 일어났다는 걸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께름칙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가 살던 집의 월세가 오르게 되었다. 이럴 바엔 이사르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동산 어플 '스페이셔스'를 켰다. 그러다 검색 기준 중에 '귀신이 들린 집 (haunted house)'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과학과 이성의 2020년대에 이게 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했는데, 홍콩에서는 거주민이 자연사하지 않고 사망한 경우, 그 집이 '귀신이 들린 집'으로 분류되며 집주인이 이를 임차인에게 공개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귀신이 들린 집'의 월세가 시세보다 충격적으로 싸면 그런 집으로 가버릴까도 고민했다. 어차피 귀신 들린 동네에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홍콩 부동산은 여전히 홍콩 부동산이었다. 귀신보다 월세가 더 오싹하게 무서웠다.


집 계약이 끝나갈 무렵, 홍콩에서는 국가보안법 입법으로 인해 시위가 잦았고 관광객들은 이미 홍콩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호텔 숙박비가 많이 저렴해졌다는 팁을 들었다. 내 지인 중 한 명이 자기 회사의 인턴이 그런 까닭으로 호텔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 지인은 그 인턴이 별난 결정을 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한 것인데, 나는 솔깃했다. 한국에서야 호텔살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홍콩은 워낙 부동산이 비싸서 집이 작디작았다. 한 때 한국 아파트의 공포의 인테리어라고 바이럴하게 떠돌았던 체리 몰딩은 하나도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좁은 홍콩의 아파트 화장실의 벽 사면이 검은색 타일로 발라져 있거나, 아니면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변기 바로 앞에 전신 거울이 달려있는 경우도 매우 흔했다. 그래도 미국에서 삼 년은 살아서 다른 나라의 주거 형태에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용변을 보는 나 자신을 전신 거울로 마주 보는 것은 아무래도 매우 부끄러웠다. 게다가 홍콩 중산층의 아파트들은 부엌의 크기가 매우 작았다. 또한 오픈 키친이 아니라 방처럼 미닫이 문이 달린 경우가 많아서 문이 닫힌 부엌에서 갇혀서 요리하고 있노라면 우렁 각시라도 된 심정이었다. (부엌 크기가 작은 이유는 애초에 아파트들이 다 작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상당수의 중산층 가정은 요리와 같은 가사를 동남아시아 출신의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여 전담시키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았다. 동남아시아 출신의 가사 도우미들이 매일매일 살아내는 노동 및 거주 조건은 내가 심정적으로 매우 불편하게 느끼는 홍콩살이의 면모 중 하나였다.) 어차피 나는 집에서 요리라고는 캡슐 커피 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 이외는 전혀 하지 않았다. 거짓말 하나도 안 하고, 매 끼니를 다 사 먹었다. 그러니 부엌이 있고 낡은 집보다는 작아도 깨끗한 호텔방에서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호텔로 이사한다면 럭셔리한 선택이 아니라 충분히 경제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호텔로 이사해버렸다. 그전까지는 배우자의 직장 근처에 살았는데, 적정한 가격대의 호텔을 고르려다 보니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동네로 오게 되었다. 호텔 주변에는 건어물 가게가 즐비해서 여름엔 온갖 건어물의 냄새가 뇌까지 훅 찌르는 듯했지만 일단 호텔 안은 정석적인 비즈니스호텔답게 무색무취했다. 호텔의 위치가 항구 근처였기에 뷰도 좋았다. 방은 작아도 한쪽면이 다 유리창이니 개방감이 있었다. 그 이전까지 살던 홍콩 아파트들에서는 창문의 커튼을 열 수가 없었다. 커튼을 열면 맞은편 건물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이웃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창문을 열 수는 없었지만, 열더라도 건너편의 누군가와 대화하려면 메가폰으로도 모자랐다. 이전 집의 월세보다 낮은 월세에, 절대적인 크기는 더 작은 방이었지만 이토록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창 밖 풍경 덕에 바다가 나의 거실이 된 듯했다. 인어공주가 부럽지 않았다. 가구는 더블베드에 작은 책상 하나, 의자 하나, 간이 옷장이 전부였다. 옷장이 작으니 옷을 계속 트렁크에서 넣었다 꺼냈다 해야 했다. 빨래는 모든 옷을 매일 샤워하면서 손빨래했다. 유학 시절에도 대학원 기숙 아파트 내에 세탁기가 없어서 항상 옷을 손빨래하곤 했는데, 그때부터 쌓은 연륜으로 한결 수월하게 했다. 호텔살이 이전처럼 식사는 테이크아웃, 배달, 외식으로 해결했다. 주거 형태가 독특할 뿐, 그리고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자주 벌어지는 지역을 피해 다닐 뿐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편이 회사로 출근하면 나는 호텔의 작은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거나, 좀 갑갑한 기분이 들면 근처 카페로 향했다. 그러다가 그 카페가 지겨워지는 날이 오면 다른 카페로, 또 다른 카페로 전전하며 일했다.


그러다 중국 어디에선가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홍콩은 2000년대에 사스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어서 홍콩 현지인들은 재빠르게 마스크 착용을 시작했다. 정부의 지침이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기관지가 약한 편이라 미세먼지 지수가 높은 날에는 워낙에도 마스크를 종종 착용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중국 대륙에서만 퍼지고 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공기가 맑으면 마스크를 끼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의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내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호텔에서 부디 상시 마스크를 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때는 팬더믹이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었던 시점이고, 홍콩 내의 감염자 숫자도 0에 수렴했다. 더불어 서양 국가의 의료진들은 PPE 수급에 허덕이고 있지 않았는가. 실제로 미국에서 내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지인 중 하나가 내게도 마스크를 사서 보내줄 수 있냐며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또, 미국 전 대통령인 오바마는 기저 질환자 등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일반인은 마스크를 낄 필요가 없으며, 의료진이 마스크를 구하기가 힘든 상황이니 의료진에게 마스크를 양보해달라는 요의 메시지를 내보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호텔 직원에게 톡 쏘는 말투로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정부에서 마스크를 끼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하냐고. 홍콩 내의 감염자도 없지 않으냐고. 왜 선을 넘느냐는 나의 말에 호텔 직원은 '당신이 나의 친구라고 생각하기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다'라고 답했다. 나는 그를 친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런 답변을 들어서 당황스러웠다. 매일 아침저녁에 얼굴을 보고 인사하고, 가끔 무언가 인쇄할 것이 필요하면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요청하느냐고 마주치고 하긴 했다. 그때마다 의례적인 친절로 그를 대했는데, 그는 그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사려 깊은 조언을 해줘서 감사하다, 하지만 나는 일단 공중 보건 전문인들의 말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나지도 않아서 세계 각국의 방침이 달라져버렸다. 손바닥을 뒤집듯, 세상이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렸다. 나도 마스크를 꼈다. 호텔 직원은 나에게 '거봐, 내가 얘기했지?'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에게 여전히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나는 가지고 있던 한국산 마스크 중 몇 개와 과일 주스를 그에게 전달하며 미안함과 감사를 표했다. 우정까지는 아니어도, 정은 나누려고 했다.


곧 호텔에서 손님들이 하나둘씩 체크아웃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투숙객을 마주치는 일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나와 남편뿐이었다. 신경 쓸 이웃이 전혀 없는 것이 너무나 자유로우면서도 묘했다. 간혹 호텔에서 결혼식을 해서 신랑 신부나 하객이 오가는 소리가 들리는 날이 있었을 뿐이다. 그 큰 빌딩에 호텔 직원들과 우리 밖에 없었다. 우리 둘을 위해서 호텔 직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또 우리 둘만을 위해서 그들이 출근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직원들과는 안부를 묻고, 경조사를 챙겨주는 사이가 되었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적막으로 가득한 마을로 이사 온 것 같았다. 창 밖에서는 파란 파도와 화물선이 고요히 오갔다.


호텔 방에서 바라본 전경. 바다 건너편에는 카울룬 (구룡반도)가 보인다.

팬더믹이 한창 기승을 부리는 동안 홍콩은 한국보다도 엄격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했다. 2020년의 상당 기간 동안 3인 이상이 공공장소에서 집합할 수 없었다. 내 친구는 남자 친구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던 중, 입구에서 친구와 마주쳐서 인사를 했는데 그를 목격한 경찰이 세 명 모두에게 과태료를 물렸다. 어린아이를 둔 가정은 식당에서 외식하기도 힘들었다. 한 번은 엄마가 한 테이블에 앉아서 홀로 식사하고, 아빠가 아이와 둘이서 옆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는 광경을 목격한 적도 있다.


사무의 풍경도 달라지게 되었다. 나야 프리랜서이니 워낙 집이나 카페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사무실로 출근하는 형태의 직업을 가진 남편은 재택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둘이 하루 종일 호텔 방에 콕 박혀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회사 아닌 회사로 출근하는데 10초도 안 걸리는 삶의 형태에 둘 다 종속되어 버렸다. 그러니 출근이 언제인지, 퇴근이 언제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집이 사무실이 되고, 사무실이 집이 되어버렸다. 월요일이 언제인지, 주말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채로 일터와 삶의 공간이 작은 상자 하나에 담겼다. 바뀌지 않는 공간에,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시간에.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부조리극 속의 인물들이 된듯한 나날이었다. 호텔 복도와 로비에서는 같은 클래식 음악이 매일, 하루 종일 반복 재생됐다.


팬더믹 이전에는 나나 남편이나 친구들과 외식하는 것을 삶의 기쁨 중 하나로 삼고 있었는데, 홍콩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으로 인해 식당에서는 모든 테이블을 2인용으로 떼어놔야만 했다. 확진자 숫자가 늘어나면 식당들이 저녁 여섯 시부터는 영업을 할 수 없기도 했다. 술집은 모두 영업을 정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식음료 업계도 죽어나갔고, 사교 생활도 증발해버렸다. 2020년을 되돌이켜보면 친구들을 거의 못 만났던 것 같다. 사회적 거리두기 규칙을 완화해줘 봤자 최대 4인이 만날 수 있었다. 정말 2020년에는 친구를 총 세명 정도만 만났던 것 같고, 그마저도 다섯 번 이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나 남편이나 내성적인 성격이었기에 망정이었다.


물론 정부 지침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진으로만 보아도 납량 특집 그 자체인 홍콩의 정부 격리 시설이 너무나 두려웠다. 내 친구의 부인은 실제로 "딱 한 번" 1회 무료 트라이얼권을 사용하여 운동 시설에 갔다가, 운동 시설에서 확진자가 나오는 바람에 밀첩 접촉자로 낙인이 찍혀, 정부에서 마련한 컨테이너 박스에서 2주간 격리를 해야 했다. 그는 정부 지침을 어긴 것이 아니었고 운이 안 좋아서 정부 시설에서 격리를 해야 했던 것이지만, 나는 어떤 방법을 써서 라도 2주간 컨테이너 박스에 갇혀서 (아이러니하게도 화장실은 공용이었다고 하지만) 당장 대혁명이라도 일으켜야 할 것 같이 품질이 불량한 식사를 먹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나더러 그래도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인도 음식을 주니 한결 낫다고 했다. 인도 음식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컨테이너 박스에서 2주간 햇빛도 하나도 못 보면서 채식 인도 음식만 먹다간... 결코 가볍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정신 건강 상태에 지대한 문제가 생길 터였다.


팬더믹 중 호텔살이는 적어도 내가 선택한 상자이니 호강에 겨운 고립이었다. 가슴이 답답한 날이면 나보다 더 훨씬 악조건에서 역병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으니, 불평불만을 말할 입장이 아니라고 나 자신을 꾸짖었다. 나는 그 방에서 머무는 동안 다섯 잎이 달린 작은 고무나무를 벗 삼았고, 나의 벗이 잎이 아홉 개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공연 작품 하나를 탈고했다. 치과에서 스케일링을 두 번 받았고, 사랑니를 하나 발치했다.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한 일 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수두에 걸리기도 했다. 호텔 방은 그런 날 충실히 돌보아 주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어디서 수두를 옮았는지는 미스터리다. 완벽한 집은 없지만, 호텔 방은 나와 남편에게 완벽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그 방 안에서 나는 안전했다. 홍콩 내의 민주 운동을 하는 시위대와 정부 간의 갈등이 심해질 때는 언제 우리가 피난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며 작은 캐리어 가방 안에 프로틴 바와 육포, 견과류와 같은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음식과 맥가이버 칼, 손전등, 현금, 신분증 등을 바리바리 싸 두었다. 정말 이기적으로 내 신변만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다행히도 그 캐리어 하나만 들고 도망을 쳐야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캐리어 속 음식물을 유통기한이 끝나기 전에 하나둘씩 꺼내서 먹어야 했다. 한 해동안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았음을 고백한다. 타인에게 득이 되지는 못해도, 유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 300여 일이었다.


일을 하다 중간에 커피를 마시거나 간식을 먹으며 창 밖을 내다보면 항구의 배들이 보였다. 어디론가 가고 있는 배들도 있었지만, 제자리에 정박해있는 배들도 꽤나 많아 보였다. 팬더믹 때문에 발이 묶인 배들이 많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하며 나날이 지켜보았다. 그래도 비행기나 배가 오가는 것이 보이는 날들이 있었다. 저 배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왜 가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찾아보지는 않았다. 나도 언젠가 저 배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내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는 날이 되돌아오길 바랐을 뿐이었다.


2021년이 다가오자 투숙 기간을 한 달씩 연장해주던 호텔에서 투숙 연장이 힘들 것 같다며 집을 알아볼 것을 권유했다. 이유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팬더믹이 장기화되고 있어서 우리를 제외하고는 다른 투숙객이 보이지 않았는데 투숙 기간 연장을 거부하는 것이 의아했다. 우리 같은 캐시 카우가 어딨다고? 혹시 호텔이 폐업하게 되는 것인가 생각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새 집에 입주하고 나서 신문 기사를 통해 투숙 기간 연장 거부의 연유를 알게 되었다. 호텔에는 중국 경찰 당국이 머물게 되었다.


2022년 10월 13일 현재, 구글맵으로 검색해보니 우리가 일 년간 살았던 호텔은 여전히 숙박이 불가하다고 나온다. 우리가 일 년간 머문 방에서 지금은 누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창문 밖의 태평양과 카울룬을 내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그 호텔의 마지막 일반 투숙객 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마스크 착용을 권유한 직원은 아직 그 자리에서 일하고 있을까? 부디 모두가 안녕했으면 좋겠다. 호텔의 직원들도, 창밖으로 보이던 섬과 바다 건너편의 사람들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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