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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선생 Dec 26. 2020

내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

[음악 에세이#14-Epilogue] 소년의 메시아


  1980년대 후반, 부산이라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에 음악을 좋아하던 한 소년이 있었다. 호기심 많던 소년은 세상의 모든 노래를 듣길 꿈꿨지만, 그 시절 TV와 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곤 몇몇 포크송과 트로트가 전부였다. 청 재킷으로 한껏 멋을 내던 전영록과 득음으로 얻었다는 탁음을 내지르던 조용필 정도를 제외하면, 한눈에 보기에도 비슷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TV 속 채널을 옮겨 다니며 기타를 치거나 소리를 꺾어댈 뿐이었다. 뭔가 아쉽고 허전했지만, 소년은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음악의 전부라고 믿었다. 작은 외삼촌의 방에 놓인 큰 책장에 관심을 가지기 전까지는.

  소년의 작은 외삼촌은 어린 시절 소아마비로 왼쪽 손이 비틀어진 채 수십 년 간 그 모습 그대로 살아온 불행한 인물이었다. 가난과 병으로 의무교육을 채 마치지 못했고, 정상적인 삶의 영위가 힘들어져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몹시 꺼려했다. 원히 방에만 틀어박혀 살 것만 같았던 그가 모든 오해와 편견을 뒤로하고 흔쾌히 세상 밖으로 나섰던 유일한 시간은 LP를 구매하기 위해 레코드점을 찾을 때였다. 

  레코드점을 향하던 그는 내가 알고 있는 그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렇게 구입한 LP를 듣는 순간은 순수한 행복에 젖어든 여느 청년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그를 보며 소년은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의 방에 꽂혀있던 수백 장의 LP와 그 속에 담긴 음악들이야 말로, 그의 힘겨운 삶을 지탱했던 유일한 희망이자 꿈이었음을.

  작은 외삼촌의 방에 꽂힌 원형의 납작한 플라스틱 조각들. LP 혹은 레코드판이라고 불리는 신기한 물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아마 예닐곱 살 때쯤이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동그랗고 납작한 플라스틱 조각이 신기했고, 그것을 하나하나 빼내어 구경하는 것은 언젠가부터 소년의 큰 즐거움이 되었다. 소년은 어린 시절 소아마비로 인해 손이 비틀어져 세상과 담을 쌓아버린 외삼촌의 처지가 때때로 안타까웠지만, 외갓집에 들를 때마다 작은방에서 그것들을 꺼내보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음에 차라리 잘됐다는 철없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알지도 못하는 알파벳을 짧은 실력으로 읽어가는 재미에 노란 머리,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익숙해졌던 어느 날, 파마머리의 새까만 얼굴과 깡마른 체형을 가진 흑인의 모습이 소년의 눈에 띄었다. '흑인'이라는 단어보다 '깜둥이'라는 말이 더 익숙할 만큼 흑인에 대한 잘못된 혐오가 팽배해있었던 시절, 이 남자만은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는 것이 소년의 기억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흰색 재킷을 입고 비스듬히 누운 한 흑인 남자의 LP판을 도무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소년은 마치 운명처럼, 작은 외삼촌에게 “LP판을 들려달라”처음 부탁했다.


MJ의 최고 명반들인 Thiller, Bad, Dangerous.


  음악을 너무나 사랑했던 소년의 외삼촌은 꼬마 조카의 부탁이 기특했는지 듣던 음악을 멈추고는, 비틀어진 왼손으로 힘겹게 앨범 재킷을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 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턴테이블에 올려진 LP가 돌아가는 순간, 소년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소년은 이런 음악이 세상에 존재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충격이자 환희였다. 몇 곡이 흐른 후, 음산한 소리와 함께 강한 비트가 요동쳤다. 다섯 번째 트랙, 「Beat It」이었다. 「Beat It」을 처음 듣던 순간에 대해, 훗날 소년은 이렇게 회상했다.



등에서 마치 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는데, 처음에는 그게 도입부의 음산한 소리
때문인 줄 알았어.

한 참 후에야 알았지.
그게 ‘전율’이었다는 걸.


  음산하고 독특한 도입부로 시작해 그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거쳐 중반부의 기타 솔로에 이르러 절정을 맞을 때까지, 노래는 쉴 새 없이 소년의 가슴을 때렸다. 4분 17초 간, 소년은 전율했다. 음악이 인간을 전율시킬 수 있을 만큼 위대한 매개임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소년은 음악과 음악가들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가득한 사춘기를 보냈다. 소년은 마치 음악을 생각하고 듣고 부르는 일이 할 수 있는 전부인 듯 살아갔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을 잃고 포기해야 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음악을 알고, 듣고, 사랑하게 된 것이야 말로 자신에게 내린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소년만의 메시아, MJ덕분이었다. 소년은 오랜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고, 친구들과 술 한 잔 나눌 때면 여전히 MJ와 그의 음악에 대해 말하곤 한다.



  내가 만약 그 날 외삼촌의 방에서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뽑지 않았다면, 혹은 내가 뽑은 앨범이 <Thriller>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렇게까지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 날 만약 「Beat It」을 들을 수 없었거나 내가 다섯 번째 노래(side B의 1번)까지 들을 시간이 없었다면... 그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야.

그 노래를 모르고 살았다고 생각해봐.
그거 지옥이야. 지옥에서 산거나 다름없다고.


Thiller의 Side B, 그를 대표하는 명곡 Beat It과 Billie Jean이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


  '음악'이라는 매개가 한 인간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음을 증명한 메시아. 지구 반대편의 이름 모를 소년마저 전율하게 만든 위대한 아티스트. ‘POP의 황제’, ‘최고의 보컬리스트’, ‘세기의 춤꾼’, ‘전대미문의 뮤지션’, ‘진정한 휴머니스트’. 하지만 그를 향한 그 어떤 찬사와 미사여구도, 오롯이 그를 대변할  없다. 그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건 오직 Michael Jackson이라는 자신의 이름뿐. MJ는  소년,  나에게 있어 그런 존재였다. 내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의 음악을 듣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또 그의 존재에 감사하는 이유다.


  고백건대, 나는 음악과 음악가들 그리고 음악에 빠져든 내 모습을 여전히 사랑한다. ‘아프리카 새깜둥이’라 놀려대던 깡마른 파마머리의 흑인이 세상 반대편 이름 없는 한 동양인 소년을 전율케 하는 기적, ‘음악’이 가진 위대함을 나는 사랑한다.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음악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 내 자신을 사랑한다. 그리고 충만한 사랑을 품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외삼촌이라는 또 다른 나의 메시아 덕분이었다.

  20대 이후, 나는 꽤 오랫동안 작은 외삼촌을 만나지 못했다. 몇 년간 순천에서 채소장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 결혼 실패와 생활고, 형에 대한 원망이 깊다는 정도가 그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후에 장사를 그만두고 부산으로 돌아와 연로한 외할머니와 티격태격 지낸다는 근황이, 그대해 내가 들은 마지막 소식이었다. 사실 꽤 오래전 그가 부산으로 돌아왔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일과 학업을 핑계로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에 대한 고마움과 추억을 묻고 지내던 어느 날 밤, 휴대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They told him don′t you ever come around here. Don′t wanna see your face, you better disappear. The fire′s in their eyes and their words are really clear. So beat it, just beat it~"
“예, 아부지”
“어. 니 엄마한테 얘기 들었나?”
“예? 뭘요?”
“작은 외삼촌. 지금 성모병원에 있다.”
“다쳤어요?”
“심장 혈관이 막혀가지고, 수술하고 호스 꽂았다는데 좀 상황이 안 좋은 갑더라.”
“예... 알겠어요.”

  믿기지 않았다. 머릿속은 텅 빈 듯했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힘이 없었다.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그간 안부조차 묻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런데 막막하고 아팠던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은 음악이었다. '음악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병원으로 뛰쳐깨어날 때까지 외삼촌을 기다려야 한다던가, 걱정하고 있을 어머니를 찾아가 위로해야 한다는 게 아니었다. 나는 음악이 듣고 싶었다.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음악을 들어야 했다.


  다만 울적함을 홀로 안은 채 밤을 보낼 자신이 없었던 나는, 먼저 늦은 밤 친구 둘을 불러내 BAR로 향했다. 늦은 시각 한적했던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노래 한 곡을 부탁한 채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 You are not alone. But I am here with you. Though you're far away. I am here to stay. But you are not alone. I am here with you. Though we're far apart. You're always in my heart. But you are not alone...”
 

  산소마스크를 낀 채 홀로 누운 당신이 외롭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You are not alone」을 들었다. 듣고 또 듣고 또 들었다. 그렇게 노래를 들으며 알 수 있었다. 왜 그토록 음악이 듣고 싶었는지, 그를 위한 다른 무언가를 떠올릴 수 없었는지를.  

  그건 나만의 기도였다. 내가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사경을 헤매는 작은 외삼촌이 아직은 멋진 흑인 남자를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나의 기도이자 의식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들으며, 그와의 오래전 통화를 떠올렸다.

"여보세요~“
“지흐이가?”
“작은 외삼촌?”
“잘 지내나?”
“예. 삼촌은요.”
“늘 똑같지 뭐. 니 신문 봤나?”
“예...”
“마이클 잭슨이 죽었다니까 기분이 좀 그렇다. 그자?”
“그러네요...”
레코드판은 한 번씩 닦나?”
“네. 레코드판이 외삼촌이라고 생각하고 잘 보관하고 있어요. 외삼촌 근데 이거 다시 안 가져가고 싶어요?”
“갸들도 주인 잘 만나서 좀 편하게 있으야지. 단디 챙기래이. 내 평생 모은긴데, 니 아이믄 주지도 않았다.”

  음악을 통해 기적을 행한 나의 메시아와 그를 보고, 듣고, 느끼게 해 주었던 또 다른 메시아. 내게 음악을 가르치고 듣는 행복을 느끼게 했던 두 사람을 만나지 않게 해 달라는 나의 기도는 다행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외삼촌이 병상에서 일어난 후, 우리는 실로 오랫만에 해후했다. 못다 한 말이 많았지만, 서로의 안부를 잠시 묻고는 길지 않은 시간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뿐이었다.


  우리에겐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른 시공간 속에서도 언제나 음악을 통해 대화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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