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우주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활동들 중에서 걷는다는 것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다. 특별한 장비도 필요하지 않으며 돈도 들지 않는다. 파트너가 꼭 있어야 하는 테니스처럼 누군가와 시간을 맞춰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으니, 걷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걸을 수 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걷기를 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마음에 위안이 되고 평범했던 하루가 특별해진다. 이유가 뭘까?
숨이 턱까지 차올라 끊임없이 나와의 싸움을 이겨내며 달려야 하는 마라톤과 다르게 걷는다는 것은 비교적 평온한 행위이다. 물론 만보, 이만보, 삼만보 등 시간과 거리가 늘어난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새로운 도전이 되겠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이라면 달리지 않는 날은 있어도 걷지 않는 날은 없으니 숨 쉬듯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걷기다. 꾸준하게 목표로 한 걸음수를 채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만.
테니스, 스키 , 서핑 등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좋아한다. 헉헉 숨소리만 들릴만큼 심박수를 올리고 허리가 자동으로 굽혀져 땅만 바라보게 되는 지경까지 격렬하게 움직이고 땀을 쏟아낼때 운동이 주는 묘미와 그 중독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달리기에는 재미를 못 찾았고 달릴 시간에 사람들과 함께 테니스 게임을 하고 싶은 사람이다. 내가 만족할 만큼 심박수를 올리고 땀 흘리기에 테니스는 나에게 최고의 운동이다. 스키는 겨울에만 할 수 있다는 계절적 한계가 있고 골프는 골프장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며 내가 만족할 만큼 땀도 나지 않는다.
몇 년 전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집 근처에 있는 학교 트랙을 뛰러 나갔다. 10분을 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단 몇 분 밖에 걸리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단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만 뛰고 집에 갈까' 하는 생각을 수십 번 반복했다. 걷기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안정은님의 '나는 오늘 모리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 전자책을 다운로드하여 읽고 있고 있다. 며칠 전 아는 작가님들과 함께 수원 행궁에 있는 안정은님이 운영하는 '달리당' 카페에 갔다가 운이 좋게도 저자를 직접 만날 수 있었고, 동행한 지인 작가님의 달리기 이야기를 들은 여파로 찾아 읽게 되었다.
몇 년 전 '걷는 사람, 하정우' 책을 읽으며 미친 듯이 걷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던 것처럼 지금 나는 또다시 뛰어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뭐든지 일단 쉽게 불붙어 버리는 나란 사람의 호기심으로 이제 막 달리기에 입문한 친한 작가님께 당장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에 같이 뛰어 보자고, 달리기 행사가 있을 때 알려 달라고. 안정은님은 다양한 달리기, 마라톤 행사를 기획하고 있는데 9월 행사들이 모두 마감이 된 상태라 아쉽다.
'걷는 사람, 하정우' 책을 읽고 블로그에 짧게 감상평을 남긴 때가 2019년 9월이다. 그로부터 약 3년 후 올해 여름, 나는 하와이에 한 달 동안 머무르며 실컷 걷다 왔다. 하정우처럼 하와이에서 걷고 싶다는 꿈이 현실이 되었다.
나는 힘들면 힘들수록 하와이에 가고 싶다. 내게 하와이가 없었다면, 많은 일과 부담 속에서 진작에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와이에서 나는 자연의 품속에 숨을 수 있고 그 밑에서 걱정 없이 쉴 수 있다. 하와이는 배우 아닌 자연인 하정우가 일상에서 누리는 최고의 호사이자 아늑한 동굴이다. (걷는 사람, 하정우 발췌)
하정우가 하와이와 걷기를 예찬했던 것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걷기 뿐만 아니라 하와이에서 있었던 모든 경험들의 매력에 빠져 버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3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하와이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하와이에서의 한 달이 어땠는지 물어오는 지인들과 하와이에 대한 수다를 한바탕 떨고 온 날에는 더욱더 하와이가 그립다. 언젠가 다시 하와이에 갈 수 있는 날을 꿈 꾼다. 3년 전 책을 읽고 하와이에 대한 꿈을 꾼 것처럼, 그리고 현실이 된 것처럼 오늘 나의 꿈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본다.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다리가 무겁다 느껴질 만큼 분명히 힘들게 걸었음에도 집으로 돌아와 운동화를 벗고 나면 머리와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피곤함보다는 개운함이 밀려온다. 장시간의 걷기로 에너지가 소진된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충전된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고 해서 마음속의 고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복잡했던 머릿속의 생각들은 멈추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고 몸을 움직여 걸었다. 다시 일어날 용기와 멈추지 않고 나아갈 희망이 온몸의 세포 구석구석에 채워진 느낌이 들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지칠 대로 지친 것은 분명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기분 좋은 휴식을 취한 것만 같다. 그래서 자꾸만 걷게 된다. 나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도, 머릿속이 복잡할 때도, 무엇 하나에도 집중이 되지 않을 때도 나는 걷는다.
걸음의 끝에는 새로운 창조의 길을 만나기도 한다. 쓸데없는 걱정과 생각들로 채워졌던 머리를 비우고 마음에 찾아온 여유 공간에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영감들이 샘솟아 그림으로 쏟아낸다. 작정하고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기대하며 걸었던 것은 아니지만, 걷는 시간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몰입의 즐거움을 선물한다.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길가의 꽃도 보고, 사람도 보며 이곳저곳에 시선을 뺏앗기며 산만하게 걸었지만 걸으면서 느껴지는 자연이 주는 소리와 냄새에 나의 모든 감각이 반응하며 느끼는 몰입의 즐거움이다.
걸으며 느끼는 몰입의 즐거움은 매번 달라진다. 사람들이 많은 풍경 속에서 걷는 연결의 위안이 있고 반면 사람이 없는 자연 속의 일부가 되어 걷는 고요의 위로가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풍경을 보고 싶을 때, 무기력하게 느껴져 역동적인 에너지를 받고 싶을 때, 나만 바쁘고 지친 일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고 싶을 때, 나만 외로운 건 아닌지 불안해질 때 북적이는 도시를 목적 없이 걷는다. 보이지는 않지만 커다란 하나의 우주 속에 인간이라는 존재로 다 함께 연결되어 같은 태양 아래 숨 쉬며 살아가고 있음을, 한 발씩 나아갈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처럼 어쩌면 하루하루 주어진 일상을 끌어당기며 남들도 나처럼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늘을 가린 회색빛 고층 건물들이 한없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 빼곡한 아파트 숲이 닭장처럼 보이고 공중에 떠 있는 아파트 생활이 아찔하다 느껴질 때, 콘크리트 바닥이 마치 나를 밀어내듯 도시에 발 딛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피로감을 줄 때, 사람의 음성마저 싫어져 가사 있는 노래조차 소음으로 느껴질 때 나는 건물도, 사람도 없는 깊숙한 자연 속을 걷고 싶어 진다. 사람의 시선도 음성도 없는 곳에서 고요한 위로를 받고 싶어서 숲으로, 바다로 나가 걷는다.
몸을 움직여 나아갈 때, 세상의 풍경도 나의 속도에 발맞추어 함께 움직인다. 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뒤로, 과거로 흘러가고 새로운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나를 둘러싼 풍경을 느리게 변화시키고 싶다면 천천히 걷고 빠르게 변화시키고 싶다면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된다. 세상의 변화 모든 것이 나의 의지에 달려 있다. 스스로 근육을 움직여 세상 속 풍경의 일부가 되는 걷기가 마음에 안정을 주는 이유이다. 주변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나의 의지로 내가 느끼는 편안한 속도에 맞춰 나아갈 수 있다.
처음에 했던 질문으로 돌아와 생각해 본다. 걸으면 행복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티베트어로 인간이란 '걸으며 방황하는 존재'라고 한다. 본래 인간의 정의대로, 걸으며 방황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고 편안할 수밖에. 원래 인간이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말이 큰 위로가 된다. 방향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느껴질 때 일단 걸어보자. 다른 것을 찾아 애써 채우려 하지 말고, 인간 본연의 존재로 살기 위해 그저 걸으면 된다.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괴롭혔을 때, 고립되어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는 정지 상태가 왔을 때 나를 살린 것은 걷기였다. 내가 했던 모든 방황으 순간들, 그럴 때마다 걷고 싶었던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늘도 걷기 위해 집을 나선다. 당장 사람이 필요하다기보다 사람의 풍경을 보고 싶은 외로운 누군가의 마음에 사람 풍경의 일부가 되어 주고 싶다. 기꺼이 걸으며 방황하는 존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