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명 Jul 27. 2018

김영미 작가의 환상과 놀이

사물과 기억들이 조형적으로 꿈꾸는 방식

김영미의 작품을 최근 마지막으로 본 전시회는 햇살이 비치는 바닷가의 어느 전시장에서였다. 가정집을 갤러리로 꾸며 전시공간으로 손을 본 그곳에서 햇살을 받은 김영미의 작품들은 꽤나 잘 어울렸다. 커다란 창을 통해 갤러리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간 빛이 그의 작품들의 이모저모를 비추며 표면들의 질감과 뛰어노는 듯 한 푸른 청화의 그림들을 생생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이 같기도 하고 성장을 멈추고 다시금 꿈을 꾸는 듯한 어른들을 되살려 놓은 듯한 형태감은 공간에서 반사되는 빛과 함께 우리가 살아서 느낀다는 감각을 유쾌하게 되살려 내고 있었다. 비록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곳 바닷가 전시공간에서 우연하게 느낀 김영미의 작업들과 또한 이들이 햇살과 함께 전해 주었던 생동감 있는 느낌들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미술을 생각하거나 이해할 때 혼란스러움을 경험한다. 예술은 더 이상 의미 있는 제시가 아니거나, 취향과 거래의 과정에 자리 잡은 모종의 교환가치의 일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마 이것은 예술이 너무 발전했거나, 혹은 대다수 예술 언어가 충분히 우리를 대변하지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적 감흥은 곧잘 '예술'이라는 (지시적인 행위의) 연장에서 경직된 자세로 우리를 얼어붙게 만들어 버린다.   


김영미의 작품을 대하면서 나는 굳이 ‘예술’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저 알맞은 공간과 햇살이나 조명, 충분히 감상할 시간만 있다면 곧바로 이들 작품이라고 할만한 조형물들은 곧바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이것이 김영미의 작품과 부산의 바닷가가 나에게 주었던 이유 있는 감흥이었다. 




 

김영미는 조각을 전공했으나 도자로 전문분야를 바꾸어 한동안 작업해 온 지역의 작가이다. 오랫동안 다듬어 온 그만의 그림과 도자적인 제작방식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작가 자신의 심상을 아로 세기며 기술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작가의 말대로 그의 작업은 어떠한 예술적 가치보다는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하나의 내적 천착의 시간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김영미의 작업은 완전히 색다른 도자를 선보이며 그곳에 조형과 일러스트, 혹은 회화에 가까운 그림들을 결합해 갔다. 오랜 시간을 거친 후 그의 작업은 작품에 새겨진 그림들이 살아서 나온 듯 조형적인 형태로 발전해 갔다. 최근의 작업들은 단순한 도자의 많은 수량의 반복적인 생산을 벗어나 비로소 독자적인 형태감을 지니기 시작했다.  





작가 자신의 기억에 남은 듯 한 낙서 같은 그림들은 도자라는 제작방식의 신중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연하고 발랄한 형태들과 색다르게 만나게 된다. 장화나 구름 같은 친숙한 오브제, 어릴 적 꿈꾸듯 영웅을 흉내 내는 어린아이와 강렬한 원색적 색감과 청화의 이질적이지만 또한 자연스러운 조화는 그만큼 꾸밈이 없다. 제각각 생명력을 지닌 듯한 언어나 이미지의 단위들이 그네들 만의 만남과 흩어짐을 지니고 나름의 유희를 즐기는 듯 보인다. 이러한 유희적 이미지의 자유스러운 결합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보다는 한때 나마 꿈꾸었던 ‘나’ 다웠던 어느 순간들을 떠올려 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유아들의 상상계의 세계에서 언어나 사물이 무엇으로나 발전 가능한 꿈의 단위이듯이 말이다.  





김영미의 작품은 다양한 이미지와 조형감이 어떠한 심상과 기술과 만나면서 그 자체로써 융합적인 기억의 저장소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숱하게 보아온 우리 지역의 어느 고도나 사찰, 벽화들에서 익숙한 방식의 형태감들이 친숙한 일상적 낙서와 이국적인 원색적 색감들과 조우하면서 그의 작업은 또한 현대적 생생함까지 붙들어 둔다. 전통적인 토우나 불상 혹은 종교적 자태를 연상시키는 인물상 등은 우리의 기억 속 일상과 맞닿은 다양한 조형감각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도자와 친숙한 기억이 예상외의 환상적인 도약과 놀이를 일깨워 주는 것이야 말로 그녀의 작품을 유니크하게 만드는 참신한 지점들이다. 


작가는 우리가 시간을 보낸 기억의 잔상에서 끄집어낸 그러한 형태감을 내면적인 자연스러움으로 재탄생시키고 있다. 그것이 현대 이미지의 미학적 타성을 억지로 이식한 것이 아니기에 더욱 가치 있게 다가온다. 그러한 상상의 시간에서 끄집어낸 빛나는 표면들은 우리에게 유쾌하고 유희적이지만, 또한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는 아이처럼 묘한 슬픔이 깃들어 있는 느낌마저 준다. 이러한 지점이 작가 스스로에게나 우리에게 일종의 안식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부산이라는 지역에서 누구나 예술의 형식이나 발전을 논의하고 있을 때, 또 바닷가의 어느 한편에서 햇살과 그렇게 어울리는 표면을 지닌 김영미의 작업은 우리에게 잊고 있던 본질적인 감흥에 관해 한 번쯤 되돌아보게 한다. 한때 주변부였던 것들, 기억에만 존재했던 것들이 지닌 희미하지만 강렬한 힘을 통해 그의 작업은 자연스레 우리 마음의 빛을 다시금 느껴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전시의 주제를 ‘내 안의 작은 아이’라는 제목으로 붙여두고 있다. 형상이나 다소 고전적인 프리미티브 아트라는 범주에 매몰될 수 있는 조금은 보편적인 형식의 표현방식에도 불구하고 김영미의 그간 오랜 반복되어 온 작업의 시간 속에 천착되어온 내면화된 표현방식을 쉽사리 평가절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가 직접 경험한 것들의 기억을 통해 보편적인 심상을 표현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언어나 행위의 연장으로 예술이 통용되는 시기에 '자연스럽다'라는 수사는 위험한 가치평가가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주변부의 삶을 살았던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이미지나 형태감의 익숙한 자연스러움을 한 번쯤 의미 있게 되살려 내볼 필요성을 느낀다. 아마 예술은 처음부터 우리의 기억 속에, 혹은 일상의 반응 속에 자리 잡은 누구에게나 열린 내적 반응의 총체였으니까 말이다.



미처 의식적으로 이해하기 이전에 김영미의 작업은 내게 시간과 진부함 속에서 잃어가던 기억의 힘을 되살려 주었다. 언젠가 담벼락 친구들의 낙서처럼 익숙하고도 생경하지만, 또한 그만의 결코 가볍지 않은 표현방식을 통해 느끼는 지역 미술의 다채로움은 즐거운 발견이다. 우리가 ‘현대’라는 부담스러운 짐을 벗고서, 좀 더 현실에서 필요한 이야기를 하도록 도와주는 조형작업을 (혹은 주의 깊게 ‘예술’이라고 부를 만한 작업을) 부산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이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 김영미 작가의 다음 작품들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도 이것이다.      


김영미 작가 / bread500@hanmail.net    










이전 01화 기쁨의 흔적으로서의 그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