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괴롭게 하고 모욕한 도저히 용서할 수도 없고 흘려보낼 수도 없는 사람이 있어요. 어떻게 그를 나의 어머니 아버지처럼 여기고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죠?
그 사람이나 그 상황 때문에 화가 나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억지로 참지 말고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그 분노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화를 내고 용서할 수 없다면 그 에너지는 어디로 흘러가고 어디에 머뭅니까. 화를 참는다면 그것은 내 안에 있을 것이고, 만약 분출 한다면 그것은 내 주변 사람들에게 파편처럼 튀어나가겠지요.
그 사람은 나를 괴롭힌 적이 없어요. 그 상황이 나를 모욕한 적도 결코 없어요.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하고 상처를 주었다고 나의 마음이 말한 거에요. 나의 마음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하고 상처를 주고 있는 거에요.
왜 내 마음은 그런 생각과 감정을 끄집어내고 나를 괴롭히죠?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충분히 정화해주지 않고 그저 덮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면의 나를 제대로 봐주지 않고 얼버무렸기 때문입니다.
미뤄두었던 숙제가 튀어나온 것은 숙제 탓입니까, 숙제를 내 준 선생님 탓입니까. 개학 전에 미뤄둔 숙제가 있음을 알려주어서 다행한 일 아닙니까. 그러니 정화의 숙제를 봄으로서 행해나갈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정화하고 무엇을 봐줘야 하나요? 남탓, 상황 탓을 하지 않고, 거기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나의 마음의 변화를 그저 바라보세요. 거기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세요. 나는 그것을 보고 있는 의식이지 그 마음과 감정과 생각 그 자체가 아님을 인지하세요.
미움과 분노, 슬픔과 외로움이 솟구친 즉시 주문처럼 말해보세요.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정화의 말은 순간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씻어줍니다. 그것으로 털고 고요한 마음으로 가던 길을 그냥 가세요. 그러지 못하는 것은 나의 마음이, 나의 에고가 그 사람과, 그 상황과, 과거의 습과 기억과,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선입관과 관념이, 선과 악의 굴레가, 도덕심과 낡은 교육이, 결국 오만가지의 생각들이 신성한 나의 본질을 뒤덮고 빛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에너지는, 즉 스트레스를 담당한 코티졸 호르몬의 분비는 단 90초만에 끝납니다. 그런데 왜 아침에 있었던 일이 저녁까지 생각나서 나를 괴롭게 하죠? 몇년이 지나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또 열이 받죠? 그것을 떠올리고, 과거의 일과 엮고, 진실이 아닌 잣대로 재단질하여 판단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 끌어당기고, 있지도 않은 일을 상상으로 만들어내 비난하고 있지는 않나요? 이쯤되면 더이상 그 사람 또는 그 상황이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히 반복하여 상황을 재생시키고 있는 이 마음이 나를 괴롭게 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의 말로 스스로를 정화해주세요.
뭐가 미안하고, 왜 나를 용서해달라고 해야하죠? 왜 고마워해야하고 왜 사랑해야하죠?
왜냐하면 우리의 본질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미안하다는 것이고, 용서해달라는 것이며, 감사하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아힘사(해를 끼치지 않음= 사랑), 사랑이 확고히 자리잡은 사람에게는 적대심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요가수트라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필요도 없고 사랑을 할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요. 고요히 있는 것만으로도 사랑과 기쁨이, 자비와 평화가 흘러나오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뭔가를 갈구하죠. 왜 우리가 그것을 갈구하죠? 우리가 그것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나요? 왜냐하면 우리가 몸 마음의 덮개를 쓰기 이전에는, 완전한 사랑과 기쁨, 자비와 평화 그 자체였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그 돌아가는 와중에 몸과 마음이라는 덮개를 가지고 태어나 정화되지 못한 마음과 마음이 만나 쨍그랑 소리를 내며 부딪혔습니다. 내가 사랑 그 자체로 존재하였다면 우리는 결코 부딪히지 않고 당신과 조우하는 순간 더 큰 사랑으로 증폭했을 것입니다. 당신을 통해 불순물로 섞인 내가 명료해지고, 그 명료해짐을 통해 나의 본질은 사랑이며, 평화이며, 기쁨이며, 행복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될 기회를 만들어주신 당신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지금까지의 그 무수했던 기회를 지금까지 잘도 날려먹어 다시금 당신과 부딪히게 되어 시바(파괴신)의 재현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신이 이와 같은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미안해하지 못해하고 있다면 그런 당신에게 미안합니다. 나의 불충분한 알아차림이 더 큰 쨍그랑으로 상처를 입혔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나는 제 잘난 줄 아는 저 위에 있는 에고가 아닙니다.
나는 한없이 당신 아래에 있고, 당신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려지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들어올리면 나는 들어올려집니다. 당신이 나를 내팽개치면 나는 내팽개쳐집니다. 당신이 주는대로 먹습니다. 입습니다. 잡니다. 노래합니다. 저항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입니다. 수용합니다.
그렇다면 나와 부딪힌 당신은 누구입니까. 모든 존재를 만든 태초의 존재가, 당신 아닙니까. 그런 당신은 나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당신은 또한 그를 통해서도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곧 그이며 그는 곧 나와 같습니다. 그러니 내가 당신을 미워한다는 것은 나를 미워하고 신을 미워하고 이 우주를 미워하는 것과 완전히 같습니다.
내가 미안해하고,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하고 감사해하는 것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용서를 구하고 사랑하고 감사해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샘.. 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를 것 같기도 한데요. 그래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거 같아요.
네.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수련을 합니다.
거친 몸을 거칠게 다루어 에고의 멱살을 뒤흔들기도 합니다. #하타요가
이기심 없는 봉사를 통해 참나를 일깨우기도 합니다. #까르마요가
신의 이름을 부르며 감정의 힘을 승화시켜 에너지를 증폭시키기도 합니다. #박티요가
고요하며 텅 빈 공간 속에 머물며 마음의 변화를 줄여나가기도 합니다 #라자요가
무한한 우주의 진동과 주파수로 의식을 맞추어나가기도 합니다 #만트라요가
절제 정진하고 자아성찰하며 신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기도 합니다 #크리야요가
차를 마시며 잃어버렸던 감각 속으로, 그 감각이 일깨워주는 명료함 속으로, 그 명료함 속에서 떠오르는 의식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차요가
수천 수만가지의 다른 종류의 꽃들이 피어납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단 하나의 꽃입니다. 다른 꽃을 흉내내고 따라하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이미 완벽한 꽃이므로 자기 자신만의 꽃을 피워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유로 향하는 해탈의 길은, 신성으로 향하는 진화의 길은 결코 똑같지 않습니다. 자신 자신만의 고유한 상처와 그 상처가 선사해주는 오롯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완벽하게 피어납니다.
요가라는 수련을 통해 충분한 물과 비료를 주세요. 성자들의 가르침으로 세워진 선명한 이정표를 제 3의 눈을 번쩍 뜨고 찾아내세요.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고개를 들어올리듯, 강이 바다로 향해 흘러내리듯, 대지 깊숙히 뿌리가 아래로 파고들듯, 우리의 꽃은, 신성을 향한 인간의 진화는 필연적으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