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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영 Aug 08. 2023

지금까지 가짜 미술을 해왔다니



나는 ‘별로’라고 생각하는 미술교육을 했다. 

인생 최대 사건, 아이를 출산하기 전까지 내 미술교육의 계보를 생각해 보았다.           

본격적으로 미술교사를 한 건 대학원을 다닐 때다. 학교와 병행한 첫 직장은 음악과 미술을 같이 하는 교습소였다. 음악은 원장님이, 미술은 내가 전담했다. 나는 수업을 하는 2시부터 6시까지, 바쁘기만 했다. 네다섯 명의 아이에게 그림을 설명하고 있으면, 다른 아이가 오고, 가르치던 아이를 보내야 했고, 또 다른 아이가 왔다. 시간 맞춰 앉히고, 가르치고, 입히고, 보내고, 자리치우고, 다시 앉히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퇴근.


아이들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다가 하원 때가 되면, 내가 나머지 그림을 채웠다. 회천 초밥 집처럼 초밥이 비면 빨리 접시를 치우고, 다시 초밥을 채우고, 아이가 오면 시간 내에 그림을 완성시켜 보내고, 다시 새로운 아이를 앉히는 활동이 반복됐다. 

선생님으로서 내 미션은 ‘시간 지키기’와 1일 1 그림. 

난 아이들의 그림에 손을 댔다. 불편했던 마음이 들 정도로 나머지를 채웠다. 

원장님은 매일 1장 그림이 완성돼야 한다고 했으므로.


두 번째는 놀이학교. 

아이들에게는 인터넷에서 재밌고, 작품결과물 좋을 것 같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을 골라서 했다. 그게 미술이라 여겼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도 좋아했기에 무언가 배워갔을 거라고 착각했다. 다양하고 신기한 재료를 순서대로 붙이는 활동, 삐져나가지 않게 색칠하기, 물감으로 한바탕 놀기, 놀이인지 미술인지 헷갈리는 미술과 요리인지 미술인지 헷갈리는 미술을 했다. 나는 단지 어른의 수준을 낮추어 미술 했다.

재미있을 것 같은 미술을.          


다음으로 내가 미술을 가르친 기관은 다름 아닌 나의 ‘집’이다.

결혼준비를 하며 집을 알아볼 때, 처음부터 미술을 가르칠 계획이었다. 아파트 1층,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 한 개를 홈스쿨로 열었다. 내가 원장이자 유일한 교사였고, 집은 남편과 생활하는 곳이자 사업체였다. 

유치부에게는 좋은 프로그램명을 지어 놓고 동화를 읽고 난 뒤 독후 활동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자연재료를 활용해 미술놀이를 했다. 

초등부에게는 스킬 위주의 수업을 하며, 미술 대회 준비를 위해 아이들에게 대회용 그림을 열심히 연습시켰다. 내가 아이디어를 내어 샘플 작업을 해둔 뒤, 아이는 몇 가지 샘플 중에 하나를 골라, 그림을 연습하고, 다음날 학교에서 똑같이 그렸다. 그 동네 초등학교 미술대회 상을 휩쓸었다. 

엄마들은 아이가 상을 받으면 연신 내게 빵이나 케이크를 선물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빵순이가 되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내가 상을 휩쓴 건지, 아이들이 상을 휩쓴 건지 중요치 않았다. 솔직히 학교에서 열리는 과학상상화 대회, 캐릭터 그리기 대회, 불조심포스터가 동네 미술교사들의 대회 같았다. 난 상을 받게 했고, 결과적으로 나의 홈스쿨은 언제나 대기자가 있었다. 이만하면 잘 가르친 건가 착각하기 쉬웠다. 

미술교육론이나 어린이의 발달을 전혀 공부하지 않은 나의 적은 시야에선 밀려드는 원생 덕분에 수업을 잘하는 교사라고 의심 없이 생각했다. 


그땐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혼자 운영하는 외로움은 커졌다. 

아이들과의 수업에서 오는 물음도 희로애락도 나눌 동료가 없었다. 살림과 일이 같은 공간에서 진행되다 보니 아이들과 복작거리며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으나, 아무것도 쌓이지 않고 투명히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설렘까지는 아니더라도 재미없었다. 일터이자 집인 이곳이 외로운 감옥 같았다. 새장 안에 갇힌 사람 같았다. 아이들이 내게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들 때 쯤. 더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 좁은 새장을 탈출하고 싶었다. 그것이 다른 새장 속일지라도. 갑자기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직장인, 나도 어딘가에 소속하고 싶었다.      

미술선생님으로서의 업을 종료하고, 박물관과 미술교육프랜차이즈 회사의 두 군데 직장을 신명 나게 다녔다. 일의 배움이 컸지만, 그 사이 일과 육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아이 곁에 엄마의 필요성이 커졌다. 회사를 결근해야 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집에서 아이를 봐주고 계시던 친정엄마의 눈치를 봤고, 회사에선 회사대로 눈치가 보였다. 

결국 사직서가 아닌 휴직계로 처리를 해 준 대표님께는 영원히 돌아가지 못했다.  

       

일과 육아의 갈림길, 어쩌면 모든 엄마의 모습이다.

내 일을 지키고 싶었지만 결국 육아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육아를 통해 나의 미술은 ‘가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기준에서 나의 미술이 가짜였던 이유를 아래와 같이 고백하면.

첫째, 미술표현의 주인을 어린이로 두지 않았다. (아이의 미술이 아닌, 나의 미술을 했다.)

둘째, 교사로서 미술공부를 하지 않았다. (공부가 아닌, 프로그램 서치를 했다).

셋째, 어린이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지 않았다. (나의 일 완성이 목표였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지난날의 미술이 보였다.

그 미술을 아이들과 엄마들은 좋아했고, 어쩌면 내가 좋은 미술선생님으로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내겐 가짜였던 미술로 아이들의 중요한 시기를 흘러 보내게 한 마음의 빚이 남아있다. 결국 내가 해온 별로라는 미술은 어린이가 아닌, 내게 시선을 맞춘 것이었다. 



   


결국 내가 해온 별로라는 미술은 어린이가 아닌,
 나에게 시선을 맞춘 것이었다.     






어린이는 어떤 미술을 원할까






미술을 가르치고 공부하고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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