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알파마 지구
‘리스본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은 여행자라면 28번 트램을 타라’는 조언이 있다. 리스본 주요 관광지가 있는 알파마 Alfama, 바이샤 Baixa, 바이 후 알투 Bairro Alto 지역을 꼼꼼히 훑는다고 했다. 남다른 여행 묘수가 딱히 없는 나는 말을 잘 듣는다. 28번 트램의 기점인 마르팅 모니즈 Martim Moniz 광장으로 갔다. 엄연히 리스본 시민을 위한 정규 노선이나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라도 되는 듯 트램을 기다리는 줄은 무척 길었다. 리스본의 상징과도 같은 노란색, 아줄레주로 꾸민 차량, 쇼핑몰 광고가 실린 것까지, 갖가지 모양의 트램을 다섯 대나 앞서 보내고서야 탑승의 기회가 왔다. 당연히 앉지는 못했지만 창 밖을 구경하기에 나쁘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광장을 출발한 트램은 좁고 구불구불한 오르막 골목을 지났다. 집들은 본래 원색이 아닌 데다 적당히 때가 묻고 바래서 소박했다. 보도에 늘어놓은 과일들과 삼각형에 동그라미 몇 개를 그려놓고 ‘Pizza’라고 적었을 뿐인 수수한 간판이 골목에 다정함을 보탰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그저 사람을 빼곡히 채우고는 가다 서다를 하는 게 중요하다는 듯 느리게 움직이는 트램과 아주 잘 어울리는 골목이었다. 28번 트램을 타야 하는 이유는 어느 관광지를 가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오래된 골목을 지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무작정 따라 내렸다. ‘LARGO DAS PORTAS DO SOL’, 내리자마자 보이는 건물에 붙은 주소다. ‘아,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Miradouro das Portas do Sol!’ 책과 지도, 인터넷에서도 여러 번 봤던 지명이다. 뒤를 돌아보니 트램이 지나간 반대편은 과연 막힌 곳이 없이 시야가 넓다. 멀리 푸른 테주 강과 가까이 알파마 지구의 빨간 지붕들이 근사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강 쪽으로만 시선을 고정하기에 광장은 과하게 활기찼다. 관광객이 몰린 탓도 있지만 현지인들도 못지않게 많은 듯했다. 사람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카메라에 경치를 담고, 또 배경 삼아 서로 찍어주기도 한다. 그저 펜스에 기대거나 벤치에 앉아 있을 뿐인 사람들도 있다. 테주 강 어디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을 것이다. 모두 나름으로 그곳을 즐기고 있다. 왜 ‘태양의 문’일까, 정확한 기원은 모르지만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테주 강과 전혀 상관없지는 않겠지 싶다. 그런데, 전망이 훌륭한 것은 확실하지만, 지금 ‘태양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테주 강이 아니라 이 시간의, 이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생기가 아닐까?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로 한참을 광장을 둘러보다 어디선가 본 곳 같단 생각을 했다. 맞다, JTBC [비긴어게인2]에서 김윤아팀이 비 맞으며 버스킹 했던 곳이다. 그러고 보니 프로그램을 촬영했던 때는 겨울이었음에도, 그때도 광장에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비 때문에 가수들은 조금 애를 먹고 있었는데 비를 맞으면서도 사람들은 진지하게 노래를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 장면을 봤을 때도, 분명히 버스킹 장소를 소개하면서 전망대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풍광에 대한 설명이 나왔지만, 경치는 배경이었을 뿐, 나는 사람들 표정에 더 마음이 갔던 것 같다. 리스본 여행을 안내하는 대부분의 매체가 이 곳을 ‘Miradouro : 전망대’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나는 본 지명 ‘Largo : 광장’으로 기억하겠다. 아무래도 포르타스 두 솔은 전망보단 사람이다.
포르타스 두 솔 광장에서 김윤아가 노래를 시작했을 때, 정세운은 숨죽이고 선배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바로 저 골목에 숨어서. 다시 28번 트램을 타고 바이샤로 갈 참이었는데 바로 그 골목을 발견하고 말았다. 정세운의 팬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연예인 병이 도졌던 셈인데 결과적으로 나는 정세운에게 고맙다. 그 골목, TV에서보다 예뻤고 재미났다. 보도블록이 아닌 돌을 깐 바닥은 그라피티로 꾸며 단정치 못한 벽과 묘한 조화가 있었다. 제대로 뒷골목 정서랄까? 그리고 거기엔 그 정서를 완성시키는 정말 다양한 버스커들이 있었다. 나무 실로폰을 연주하는 사람, 저글링 묘기를 선보이는 이, 2층 테라스를 무대로 삼은 밴드까지, 한참을 넋을 놓고 구경했다. 나는 그 골목에서 정말이지 생각지 않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세운에게 고마운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골목 끝에 높은 아치가 있었고 통과해 보니 상 조르즈 성 Castelo de São Jorge 입구였다. 상 조르즈 성은 가려고 미리부터 계획한 곳이긴 했다. 그런데 지도는 성 전체의 위치는 표시하고 있었지만 출입구를 찾아가는 길은 명확하지 않았다. 진짜 지도가 부실한 건지 내가 길 찾기에 능하지 않은 건지, 뭐가 됐든 나는 엄청 헤맬 각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들어선 길에서 이렇게 쉽게 만나다니, 정말 정세운 만세다!
상 조르즈 성은 5세기 고대 로마인들이 처음 쌓아 올렸고, 이후 리스본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줄곧 도시의 방어 요새였다고 한다. 성벽 앞에 서면 설명은 바로 이해가 된다. 적이 어느 쪽에서 나타나도 알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도시 전체가 모두 내려다보인다. 순서를 바로 잡자, 이해에 앞서 감탄이 먼저다. 성에서 맞닥뜨린 장관은 머리도, 눈도, 그 순간에 붙잡아 놓기에 충분했다. 발밑으로 알파마와 바이샤가 보이고 시선을 위로 두면 4월 25일 다리 Ponte 25 de Abril와 테주 강 건너편의 예수상 Santuário Nacional de Cristo Rei까지 보인다. 과거 리스본을 ‘언덕의 도시’라 한 이가 있었다고 한다. 트램을 타고 골목을 오르면서도, 포르타스 두 솔 광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도 그 말을 떠올리지 못했는데, 상 조르즈 성에서 실감했다. 리스본 관광지도에는 유독 ‘전망대’라고 표기된 곳이 많았다. 보통 그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는 키 큰 건축물들이 본래 이름과 함께 ‘무슨무슨 전망대’라고 소개되곤 했고 지정된 엘리베이터는 한 무리의 관광객을 사방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공간에 현기증이 날 것 같은 속도로 실어다 뒀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는 아무래도 ‘전망대’라는 단어에 롯데월드타워와 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리스본에 높은 건물이 많나?’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는 착각도 잠시 했었는데...... 건물 꼭대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곽에서 깨닫는다. 리스본은 스스로 높다. 그 높은 성벽에 나는 시간을 잊은 채 한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어쩌다 보니 28번 트램 투어는 하지 못한 셈이었다. 상 조르즈 성을 산책 삼아 한 바퀴 돌고 포르타스 두 솔 광장 근처 작은 피자 가게에서 요기를 했다. 리스본 대성당을 구경한 후 지는 노을은 그라사 전망대 Miradouro da Graça에서 봤다. 결국 알파마를 벗어나지 않은 하루가 되었다. 대지진 때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알파마는 바이샤와 다르게 복원 시에도 옛 형태를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덕분에 오래된 동네는 이렇게나 매력적이어서 종일 사람을 붙잡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