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기차죠!”
꽤 오래 연락을 않던 지인과 다시 톡이 오가는 중이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이 여행 중이라 하니 자연스럽게 ‘어디인가요?’라는 질문이 이어졌고, 마침 기차를 타고 있던 내가 한 답이었다.
「비행기를 타는 일은 ‘이동한다’보다 ‘옮겨진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책, [다시, 포르투갈]의 첫 문장이다. 아마 내가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비행은 게임 속 아바타처럼 공중으로 들려 올려졌다 위치가 바뀌어 내려지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다르다면 게이머의 클릭보다 비행시간은 때로 지겨울 만큼 길어서 그나마 ‘거리’를 따진다는 정도이지 싶다. 물론 타기 전 설레기도 하나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한 공은 공항의 것이지 비행 자체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기차는 그렇지 않다. 완벽한 이동이다. 출발지와 목적지보다 ‘움직이는 동안’이 어쩌면 더 중요하다.
나의 첫 유럽여행은 참 서툴렀다. 여행에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아니, 사실은 그걸 몰랐다. 철두철미한 계획이라도 있어야 하는 줄 알았던 게 가장 맹점이었다. 예상대로인 것은 하나도 없어서 계획이 소용없어질 때마다 멘붕이 왔고 일정을 깨지 않겠다고 아등바등하니 수습은 더 어려웠다. 팔팔 날아다니는 이십대면 모든 고난을 젊음으로 이겨 먹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서른 하고도 하나를 더 먹은, 퀴퀴한 실험실에서 다크서클 키워온 처지였으니 체력은 금세 바닥이 났다. 그랬던 내가 다시 기운을 차린 곳이 기차였다.
프랑스 France에서 스위스 Switzerland로 넘어갈 때였다. 다음날 융프라우 Jungfrau에 오르는 게 스위스에서의 유일한 계획이었으므로 그날은 스위스에 잘 도착만 하면 되었다. 기차에 오를 때까지도 바짝 마음을 조였는데 자리에 앉고 나니 한참을 간단 생각에 비로소 긴장이 풀렸던 것 같다. 그제야 창밖이 보였다. 푸른 언덕과 아름다운 호수가 거기 있었다. 다음 역에서 무턱대고 내려 소박하지만 예쁜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내 나이를 잊고 대학생들의 여행기를 참고한 탓에 보름 동안 런던 인 로마 아웃의 무려 여섯 개 도시를 다니는 일정이었고, 여러 번 기차를 타야 했으므로 유레일패스 Eurail Pass를 이용했었다. 그러니까 기차는 맘껏 탈 수 있었기에 그렇게 기차를 타고 내리며 스위스 작은 마을들을 산책했다.
에펠 탑 la Tour Eiffel과 콜로세움 Colosseo을 직접 보는 것이 의미 없지 않았고, [빌리 엘리엇 Billy Elliot The Musical]를 웨스트엔드 West End에서 관람한 것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여행에서 최고의 순간을 꼽으라면 그날의 기차다. 마음을 풀어주는 풍경이, 모르는 동네에서 목적 없는 걸음이 지쳐있던 나를 회복시켰다. 기차가 아니라 스위스라는 나라가 좋았던 게 아니냐고? 어느 정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밀린 일기를 쓰다 나른해지면 잠깐 눈도 붙였다. 그러다 희끗 예쁜 풍경에 눈을 뺏겨 넋을 잃었다. 마침 기차가 서면 후다닥 짐을 끌어내렸던 것이지만 창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웠다. 덜컹거리는 버스와 현실감 없는 구름 속 비행기에는 기대할 수 없는, 기차만 줄 수 있는 행복이었다.
이후로는 보름씩이나 여행을 다닐 형편도 아니고 그럴 수 있어도 무리하게 일정을 짜지 않는다. 일주일 내내 한 도시에만 머물거나 옮긴다고 해도 두어 곳 정도다. 당일치기로 근교를 다녀오기도 하지만 기차를 타는 일이 잦지는 않다. 또 목적지가 분명한 표를 사지 패스를 준비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그때처럼 맘에 드는 풍경에 탔다 내렸다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기차를 타는 동안을 나는 여전히 좋아한다. 지나는 풍경이 감탄할 만하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어릴 적 불렀던 동요의 기찻길 옆 오막을 만나서 반갑다. 글을 쓰고 책을 읽기도 하는 한편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리를 비우는 시간일 때도 있다. 도착 시간까지 온전히 느슨해질 수 있어서 참 좋다.
리스본에서 코임브라 Coimbra까지는 2시간 30여분으로 먼 구간은 아니었다. 지인과 톡을 마친 후 가져온 책을 꺼냈다. 서울의 어느 독립 서점에서 전혀 그림도 없이 탁한 회색 바탕에 ‘여행자’라고 정갈히 쓰인 표지에 끌려 산 책이었다. 열 쪽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잠깐 숨을 고른다.
'집에 돌아'올 순간을 위해서 여행자는 또다시 ‘변變’했다. 그는 분명 평소와 달라졌다. 가끔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여행자의 눈은 달라졌다.
- [여행자] p8, 胡晴舫 HuQingfang 저 -
‘기차에 오르기 전 테주 강에서의 눈물*은 나를 조금 바꿨을까?’...... 다시 저자의 생각을 듣는다. 그날의 기차는 독서와 사색으로 채워졌다. 그 시간이 또 유의미한 기억 한 조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