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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a Apr 08. 2021

감정이 머물던 마을

 당신은 어린 나이에 등단을 했습니다. 당신이 궁금했기에 쓴 글들을 찾아보았죠.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글은 소박하게 여린 감정을 담아내어 반짝반짝 빛이 올라오는 듯 보였죠. 평온한 문체로 쓰인 당신의 글들은 담담하고 담백했고, 저는 서점에 선 채로 멈춰서서 오랫동안 당신의 글을 읽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가 엷은 빛을 내는 듯 그렇게 햇살이 비치는 물결같은 당신의 글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습니다.


 기말고사를 볼 때, 각 문제에 대한 답만 간단하게 적은 제가 답안지를 제출하자 교수님은 당황하셨습니다.

이게 다냐고, 물으셨죠.

맞는 답만 잘 적었다고 생각한 저도 같이 당황하여 네, 뭐가 잘못되었나요? 라고 물었지요.

제가 경영학과 학생이고 국문학을 복수 전공한다는 것을 아신 교수님은, 경영학처럼 시험을 보면 안된다고 소근소근 말씀해주셨습니다. 답안을 한 줄로 내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고, 적어도 반 장은 채워야 한다고.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문제가 이렇게 간단하고 남은 시간이 적적한데도 다들 답안의 빈칸을 전속력으로 메꾸고 있었죠. 머쓱해진 저는 다시 자리에 앉아 열심히 빈칸을 채웠습니다. 


 답안지를 많이 채워서 다시 제출한 제게 교수님은 빙그레 웃어주셨지요. 그 해사한 미소에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마음이 정말 이상했죠. 울렁거리는 듯 부유하게 들뜨는 그 감정이란. 저는 그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정리하러 술자리에 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술을 마셔도 그 목이 타들어갈 듯한 갈증과 이상하게 들뜨는 부유감이 해소가 안 되더군요.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요.


 해당 과목 성적을 확인했는데, 충격적이게도 점수가 C+로 나왔죠. 저는 너무 당황해서 교수님께 메일로 성적 이의 제기를 하였습니다. 교수님은 친절하게도 제게 직접 전화를 주셔서 조목조목 설명해주셨죠. 출결 이상 없고, 기말 시험이 총 10문항 이었는데 그 중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이렇게 적었고, 거기에서 자신이 줄 수 있는 점수는 몇 점이었고......다른 과목과 달리 너무 정연하고 논리적인 교수님의 답변에 저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멍하니 교수님의 사근사근한 목소리에만 마음을 빼앗긴 채 듣고 있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한 마디를 보태셨죠.

중간고사를 대체했던 과제에선 당신이 만 점을 주었다고요. 


 단편 영화 시놉시스를 짜오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중간고사 대체 과제였고, 다른 학생들과 교수님의 평가로만 채첨이 이루어지는 과제였죠. 저는 신데렐라의 줄거리를 조금 바꿔서 제출했어요. 업소 여성이 주인공이 되어, 구원받지 못하는 초라하고 비참한 삶에 대해서요. 주인공의 성을 유리구두에 빗대어 그것을 주운 사람과 잃어버린 사람이 겪는 갈등과 해소에 대해서요.

학생들은 성을 파는 여성을 감싸는 듯한 제 시놉시스를 공감하지 못했고 질문이 빗발쳤습니다. 저는 그래도 질문에 답하며 제가 해석한 신데렐라의 새로운 줄거리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죠. 질문이 끊길 줄 모르자 이내 교수님은 그만 하자며 종료를 시켜주셨습니다.


당시 제 아이디어에 높은 점수를 주셨다는 교수님은 정말 감명 깊었다며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감명 깊었다는 당신의 목소리의 울림을 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맑고 청량한 울림은 저를 또 그 부유감에 젖게 하였고, 저는 한참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이라는 것을요.

상대평가기 때문에 다른 학생 한 명이 취업을 이유로 과제를 결국 제출하지 않았다며, 그 학생과 제 점수를 뒤바꾸어 B0로 올려주었다는 당신의 말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 감정에 스스로 너무 당황하고 놀라서, 제대로 감사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황급히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그저 성공한 어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일 뿐이야, 위로하며 자꾸 치솟는 감정을 애써 눌렀지요. 이상하니까요.


그 다음 수강신청을 할 때 깊이 고민했습니다. 교수님의 수업을 다시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다시 교수님을 보면 그 이상한 감정이 더 깊어지는 것이 아닐지, 두려웠기도 했죠. 그래도 어차피 교수님이 저라는 학생에 대해 기억을 못 하실 테니, 깊어진다고 해도 상관 없겠다 싶었어요.

설마 당신이 제 이름을 기억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제 이름을 기억하고, 일부러 교내 공모전에서 절 선택하지 않으시고, 시 창작론 수업에서 제게 아는 척을 해 주셨을 때 저는 이 초라하고 환영받지 못할 감정이 순식간에 깊어지는 것을 느꼈죠. 더불어 그 감정을 어찌할 바 모르는 제 멍청한 태도에도 화가 났습니다.


제 감정을 알 리 없는 교수님은, 그 다음에 제가 창작해 온 시를 보고 크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써내려간 제 글귀는 오직 한 사람에게로 흐르는 감정을 담고 있었죠. '다듬지 않은 원석'이라는 표현을 해 가며 당신은, 소수로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에 혹시 참여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셨죠. 당신께서 직접 지도를 해 주고 싶으시다고요.

당시 닿을 수 없는 마음이 너무 깊어진 저는 당신과 이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일이 두려웠습니다. 그저 당신은 교단에서 저는 책상에서, 허락된 강의 시간 내내 당신을 바라보는 것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이 시간이 좋았습니다. 당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며 오로지 당신의 눈과, 입술과, 표정에만 집중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이 시간이 제겐 허락된 축복이었죠.

당신과 가깝게 지내다가 저도 모르게 불쑥 당신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까봐, 저의 글에서 문득 당신을 향한 감정이 모두가 알아챌 정도로 크게 나올까봐, 그 모든 것이 두려웠죠.

저는 아르바이트 핑계를 대고 거절했습니다. 당신은 아쉬워하며 그래요, 어쩔수 없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의 시선을 피하며 웃었지만, 마음 한 켠이 쓰라린 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교수님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하교하던 일이 생각나네요.


'시 창작론'이 야간 수업이었기 때문에 우린 수업이 끝난 후 교정을 나란히 걸어 내려갔습니다. 약간 서늘한 밤공기와 구름 사이로 간간히 내비치는 달빛이 은은하게 우리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과 같이 그 거리를 걷는 것이 너무 좋았죠. 

당신을 향한 마음이 혹시라도 티가 날까 저어되어 어색해진 저는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지만, 당신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저에 대한 사소한 것들을 물어보았습니다. 왜 경영학과 학생이 국문학을 전공하는지 물어보신 당신에게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글을 썼어요, 라고 답했습니다.

당신은 놀라며 그럼 왜 애초에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셨고, 저는 망설이다가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라고 솔직하게 답했습니다. 그 짧은 한 마디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당신은 눈치채셨고 이내 다른 것들을 물어보셨죠. 아무래도 진로가 명확하게 정해질 수 있는 과는 아니었으니까요. 학교 다니는 것은 재미 있는지, 수업의 질은 괜찮은지 등을 물어보시다가 당신은 제게 남자친구는 있는지 물어보셨죠.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한 제 모습을 당신은 오해했습니다. 좋아하거나 잘 되어가는 사람이 있나 보네요, 라며 웃는 당신에게 차마 교수님이 신경이 쓰인다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사람이었죠. 그런 당신을 동성인 제가 좋아한다고 하면 어떤 대답이 돌아왔을까요?

당신의 수업을 더 이상 듣게 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학교를 더 이상 다니게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저는 그냥 거짓말을 했습니다. 12살 차이 나는 남자친구가 있다고요. 당신은 깜짝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죠. 사방이 어스름한 거리에서 긴 속눈썹 속 커지는 당신의 눈망울이 또 그렇게 예뻤습니다.


사실 그런 가상의 남자친구를 만들어 낸 것은 일종의 방어였습니다.

저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저는 남자친구가 있으니 앞으로 당신에게 좀 더 살가운 행동을 하더라도 제 마음을 알아채지 말아줘요. 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을 좋아하니 당신의 나이가 문제 되지 않아요. 그런 앙큼한 마음이 섞인 방어의 거짓말이었습니다.

저는 남자친구의 직업이나 성격 등을 묻는 당신에게 아무렇게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한 국내 화장품 회사에 다니고 있고 잘 대해주지만 바빠서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고요. 화장품 회사라고 거짓말을 한 이유는 제가 당시 화장품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새빨간 거짓말을 고개까지 끄덕이며 들어주더니, 학생이 성숙해서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이랑도 말이 잘 통하나 보네요, 라고 했지요.

그 말 한마디가 몰고 오는 달콤함이란. 전 당신에게 남자친구 회사에서 증정으로 나오는 무료 화장품 샘플이 있는데 선물해 드릴게요, 라고 말해버렸습니다.

당신은 어머, 정말? 부담되지 않는다면 받을게요, 라며 웃었지요. 그 사르르 녹는 미소가 어찌나 선물 같던지요.

저는 사비로 당신의 연령대에 맞는 기초 케어 세트를 구매했습니다.

매니저 언니의 도움을 받아 정말 오랫동안 고심해서 골랐지요. 언니는 대체 누구에게 선물하길래 이렇게까지 고민해서 고르냐며 궁금해했고, 저는 그냥 고마운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이라고 둘러댔습니다.

몇 번이나 포장을 했다가 풀다가를 반복하며 정성들여 포장을 했지요. 어느 날 예뻐서 책갈피에 꽂아둔 말린 꽃 한송이를 같이 끼우고, 당신을 닮아 단아한 색의 한지로 포장을 싸며 쿵쿵 뛰는 심장의 울림을 조용히 진정시켰지요. 

카드라도 하나 넣어서 드리고 싶었는데, 도저히 카드에 쓸 말이 없더군요. 그래서 딱 한 마디를 썼습니다. '존경하는 교수님께' 라고요.

그 때 그 화장품을 당신은 사용했을까요?


교수님의 세 번째 수업인 '현대문학론'에서 다 같이 어느 궁으로 야외수업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별 감흥 없는 곳이었지만 모두가 들떠 있었죠. 다시는 당신의 수업을 듣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다짐이 무색하게 당신의 수업을 또 신청한 저는 제 자신을 강하게 탓하고 있었죠.

그래도 홀린 듯이 당신의 강의를 듣고, 당신이 입은 옷을 보며 아침에 그 옷을 골랐을 당신을 상상하고, 비슷한 옷을 구매해서 입어보는 등의 일련의 행동을 반복하며 저는 그저 이대로도 좋다, 생각했습니다.

그저 당신은 저를 성실하게 수업에 임하는 학생으로 대하고, 저는 저의 이런 마음을 숨긴 채로 당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이 정도 거리와 이 정도 감정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야외수업 날, 당신이 크게 드리운 단풍나무 아래 서 계신 모습을 보고 저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흩날리는 바람과, 온갖 꽃나무가 즐비한 정원과, 그 정원을 온연히 담아내는 돌다리 밑의 연못, 그리고 연못 속 당신이 비친 물결의 투명함을 보며 저는 제 감정이 톡 하고 건들면 터질 듯 커져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쩐지 눈물이 나왔습니다. 교수님이 대한 저의 마음이 쉽사리 잊혀질 수 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니 닿을 수 없는 애타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배덕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저의 이 하찮은 감정 속에서 이겨내지 못할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저는 그 야외수업내내 오직 눈으로 당신의 모습만 쫓았지요.

단풍나무 아래의 당신에게 아무도 듣지 못하게 나지막하게 언니, 라고 불러보았습니다. 교수님이라고 당신을 부를 때 마다 좁혀지지 않는 우리의 거리가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언니, 라고 음성을 내뱉을 때 목이 메었습니다. 누군가 목 깊은 곳을 손으로 꾹 잡고 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전 단 한 번도 당신의 강의를 수강하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피했습니다. 당신과 교내에서 마주칠까봐, 혹시라도 같은 지하철에서 마주칠까봐.


열심히 피했는데 당신과의 재회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졸업 논문 지도 교수였던 당신은 저를 담당하게 되었지요.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당신은 안 본 사이 살이 빠졌고, 머리가 좀 더 짧아졌고, 눈 속 깊이 담긴 순수함이 좀 더 짙어진 느낌이었습니다. 당신이 살이 빠진 이유를 나중에 알았을 때 저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남편의 불륜으로 결국 이혼했더라,는 소문이 제 귀에까지 들어왔을 때 전 감히 당신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더불어 당신 곁을 지켜주고 싶은 한없는 욕심도요.

저를 한 눈에 알아보신 교수님은 정말 오랜만이라며 웃으셨죠. 저는 어색한 미소만 지었습니다. 저를 차라리 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또 감정이 눈치 없이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논문 주제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현대 문학에 나타난 동성애적 코드 분석'으로 잡았지요.

일종의 될 대로 되어라, 는 감정이었습니다. 어쩌면 저의 이런 감정의 한 구석을 당신에게 조금 보이고 싶다는 과감한 생각도 들었지요. 어쩌면 저의 성향이 그런 쪽이라는 것을 당신이 조금 알아채 주었으면, 하는 기분도 조금 있었습니다.


당신은 전혀 이상한 낌새를 차리지 못하고 제 논문을 열심히 지도해 주셨지요. 참신한 주제라고 하시며 각 목차별 주제를 정하고 도입부에 들어갈 글들과 참고할 수 있는 문헌들을 체크하셨습니다. 그저 교육의 연장선으로만 저와의 만남을 지도하는 당신의 모습에서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마음이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그리고 이대로 티내지 않은 채 마음을 접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오직 저 혼자만 간직하기로요.


졸업식 날 가족과 사진을 찍고 있는데 당신이 제게 걸어왔지요. 저는 활짝 웃으며 카메라를 보다가 당신을 보고 그만 굳어져 버렸습니다. 졸업을 축하한다며, 환하게 웃어보이는 당신에게 저의 속도 모르는 어머니는 같이 사진을 찍어주시겠다고 했죠.

그날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게 팔짱을 꼈습니다. 순간 심장이 멈출 듯 빠르게 뛰었고, 제 얼굴로 모든 열기가 올라오는 듯 했지요. 당신에게서는 시원하면서도 청량한 향기가 맴돌았습니다. 감히 당신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제게 당신은 사진이 나오면 전해달라고, 졸업해서 아쉽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끝내 사진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날 사진에 찍힌 제 표정과 빨개진 얼굴이 당신에 대한 저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지만 그때의 그 애틋한 감정은 제 마음 한 켠에 남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아련함이 되었습니다. 취업준비를 하다가, 일을 하다가, 친구들과 놀러 갔다가 그렇게 문득 당신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당신의 눈에 가득 비추었던 그 순수했던 표정과 졸업 논문을 지도해 주실때의 그 옅은 우울한 표정이요. 당신이 왜 우울해하는지 아주 조금 눈치챘지만 감히 위로할 수 없었던 그때의 제 안타까운 감정이요.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모든 것에 맞서 싸워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던 자격 없는 제 모습이요. 그 모든 감정들과 기억들이 한데 웅크러져 문득, 떠오르곤 했습니다. 저는 지나간 감정의 정리를 잘 하지 못하는 편이니까요. 그래서 당신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욱신한 통증으로 가슴 한 켠에 가만히 자리잡게 두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십수년이 지난 오늘, 교수님께 이 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제 이름으로 된 책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가장 먼저 교수님께 선물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내용은 인어공주를 사랑한 마녀의 이야기입니다. 인어공주는 물에 빠진 왕자를 구하지만 정작 왕자는 이웃나라 공주와 사랑에 빠져버리죠. 왕자의 사랑을 받지 못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인어공주의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마녀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마녀는 인어공주를 무척 사랑했지만 결국 그녀가 얻을 수 있던 건 인어공주의 머리카락과 목소리, 그리고 닿을 수 없는 마음 뿐이었지요. 아무리 인어공주에게 다가서도 그녀는 마녀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녀가 곤경에 처할 때만 마녀를 찾아올 뿐이었죠.

마녀는 그녀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을 찾는 것이 좋아서, 계속 그녀가 곤란해지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마음 때문에 그녀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결국 인어공주 대신 자신이 죽기를 바라고 원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감정선 표현이 좋은 평을 받았습니다. 

 

작가의 말에 오랫동안 당신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을 적었습니다. 난 언제나 마녀였다고, 닿을 수 없이 물거품으로 사라진 인어공주에게 부디 그녀의 행복을 빈다고 적으면서 눈 가득히 눈물이 고였지만, 흘리진 않았습니다.

이 편지 또한 당신에게 전하지 못한 채 그저 제 마음 속 깊이 곱게 접어 간직해야겠지요. 당신에게 직접 전달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당신을 마주하면 불쑥 튀어나올 이 감정의 크기가 두려워 그저 우편으로만 부치려 합니다.


오래도록 건강하시고, 부디 당신이 더 이상 아프지 않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당신의 남은 생이 온통 행복으로 가득 차면 좋겠습니다. 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벚꽃잎들이 저의 마음을 당신에게 전하지 못한 이 편지 대신 전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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