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na Apr 08. 2021

첫 강의를 기억하는 순간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교수님.


저는 지금 벚나무가 열을 맞춰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거리에 서 있습니다.

이상하죠, 매년 보는 풍경인데도 볼 때마다 낯설게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새하얀 팝콘들을 가득 품은 고운 솜사탕처럼 몽환적인 모습에 저절로 가슴이 설레네요. 교정에도 큰 벚나무가 몇 그루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교수님께서도 살랑이는 바람에 벛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저 모습을 보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어느덧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들이 새로이 잉태하는 계절이 밝았습니다. 땅 속에 묻힌 채 잠만 자던 개구리가 깨어나고, 각종 아기자기한 씨앗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싹을 움트는 시기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계절입니다. 교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강의를 하러 학교에 나오실 시기니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서운 바람에 코트를 잔뜩 여미고 다녔는데, 언제 추웠냐는 듯 시침을 떼고 날이 한없이 따스하기만 하네요.

그래도 이번 주말에는 비가 내린다고 하니 아직 코트를 옷장 속 깊이 넣으시진 마세요. 어쩌면  비가 내리고 나면 당분간 다시 추워질 수도 있으니까요.

저도 지난주에 날씨가 하도 따사로워서 얇은 가디건만 걸치고 다녔는데, 하필 비가 내려서 가벼운 감기에 걸렸답니다. 그 후로는 일부러 겨울 옷을 한두 벌 꺼내놓았습니다. 겨울이 완전히 지난 늦봄 쯤 완전히 넣어두고자 합니다.


사실 저는 맺고 끝는 것을 잘 못하거든요. 옷 정리만 해도 그렇습니다. 완전히 계절이 바뀌어도 묵은 옷들을 옷장 속 깊이 넣지 못하지요. 언제나 한 켠에 지난 계절의 옷을 한두 벌 내놓곤 합니다. 뭐 하나 완벽하게 끊어내질 못합니다. 영화를 볼 때도 끝까지 본 적이 거의 없답니다. 차마 마지막 장면을 보지 못하고 상영관을 나온 적이 많은데, 그래서 다른 사람과 그 영화 이야기를 하면 보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 관계도 그런 식이죠 . 저는 지나간 인연의 정리가 힘듭니다.


옷 정리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감정 정리를 잘 못하거든요. 그렇게 가위로 색종이 자르듯 썩둑, 잘라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제 감정은 마치 녹슬고 들지 않는 가위로 질긴 천 조각을 자르듯, 가위질을 하면 할수록 온통 꼬인 실이 풀어질 뿐 잘 끊어지지 않아요. 그래서일까요. 아직도 당신을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욱신한 통증으로 아립니다.


그동안 건강하게 지내셨는지요.


저는 가끔 일상에서 교수님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가을철 떨어지는 낙엽을 보거나 겨울 온 동네에 눈이 소복하게 쌓인 모습을 보면 당신 생각이 나곤 했어요. 빗물이 항아리에 똑똑 떨어지며 작은 웅덩이를 만들 때나, 사방이 푸르름으로 가득 차는 한 여름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고 앉아 수박을 반으로 쩍 가를 때 교수님의 얼굴이 문득 떠오르곤 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제 청춘에 크고 작은 영향을 많이 주셨으니까요. 더불어 제 감정선에도요. 글을 쓰다 교수님을 떠올리면 잘 풀리지 않던 주인공들의 감정선의 정리가 쉬웠거든요.


아마 교수님께선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저 강의를 듣던 학생 중 하나겠지, 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어쩌면 제 이름을 기억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이름이 조금 특이하니까요.

아직도 기억나네요. 제가 당신에게 들었던 두 번째 강의인 '시 창작론'을 들을 때였습니다. 당시 과제로 3편의 시 창작을 해 오라고 하셨죠. 당신께서는 제가 쓴 시를 보시고 강의가 끝난 후 조용히 저를 부르셨습니다.


당황해하는 제게 혹시 지난 교내 공모전에 시를 낸 적 있냐고 물으셨고, 맞다고 하자 사실 저와 다른 사람을 대상 후보에 두고 많은 고민을 하셨다고 했지요.

저를 선택하지 않으신 이유는, 혹시나 싶은 의혹을 받을까 싶어서였다고 하셨지요.

제 이름이 특이했기에 어디선가 분명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어서, 혹시 당신의 수업을 들은 학생이 아닐까 싶으셨다고요.

당신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라 편애하는 마음에 대상을 준 게 아닌지, 하는 주위의 시선이 조금 염려스러웠다고요.

그래서 제게 상을 주지 않으셨다고,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당신께서는 다른 후보가 수상 소감을 건방지게 밝혀서 괜히 그 친구에게 주었다고 조금 후회가 된다고 하셨지요.


저는 그때 이미 대상보다도 교수님이 저를 알아봐 주셨다는 점이 더 감동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청렴한 마음도 감명깊었습니다.

요즘은 그렇잖아요,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해도 걸리지만 않으면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교수님은 직위도 높으셔서 만약 그렇다고 해도 눈 딱 감고 주셨어도 되었을 것을 그런 소소한 것까지 신경써서 고민하시다니, 제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교수들의 이미지와는 확연히 다른 분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 날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하겠지요. 그래서 조금 기대하게 됩니다. 이미 십 수년이 지났지만, 혹시 당신이 제 이름을 보고 저를 알아봐 주실지에 대해서요.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해도 상관 없습니다. 그 편이 제게 조금 더 나을 수도 있겠어요.


교수님의 첫 강의를 들었을 때가 생각나네요.


당시 '단편 영화의 이해'라는 계절학기 수업에서 당신을 처음 뵈었지요.


저는 1학년 때 수강했던 과목들을 모조리 날리고 학점을 채워야 했습니다.

당시 저는 마음을 제대로 다잡지 못해서, 1년 간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았거든요. 통 공부를 하지 않았죠.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요. 원래 배우고 싶었던 학과가 아니었으니까요, 학교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2학년 때 비로소 복수전공으로 국문학을 신청하며, 교수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을 본 순간 눈매가 참 소녀처럼 천진하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소녀같이 어려보이는 얼굴에 비해 목소리의 울림이 어찌나 성숙하던지, 깜짝 놀랐지요. 마치 공연을 많이 한 배우처럼 성량이 청량하고 맑았습니다.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이지 않던 당신은 나중에 알고 보니 서른 후반의 나이였지요. 나중에 조교에게 당신의 나이를 전해듣고 어찌나 놀랐던지요.


워낙 평소에 젊은 학생들과 함께 지내시다 보니 세월을 피해가신 걸까요, 아니면 교수님의 순수한 마음 덕분에 더 이상 나이가 들지 않으신 걸까요.

아마 단상 위가 아닌 책상에 앉아 계셨더라면 누구도 당신과 학생을 구분할 수 없을 거예요.


당신은 우리에게 단편 영화를 보여주고, 조별로 영화가 주는 메시지와 각자의 감상평을 논의하여 발표하게 하셨죠.

솔직히 단편 영화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대부분 블록버스터의 매운맛에 길들여진 저희는 그 담백하면서도 잔잔한 내용에 담긴 깊은 의미를 헤아려보는 게 힘들었지요.

수업을 반복하며 점점 단편 영화를 보는 것에 익숙해지고, 서서히 안에 담긴 메시지들을 추론할 수 있었지만 처음으로 본 그 단편 영화는 다들 이해하기에 난해했습니다.

주인공이 라면 봉지 위에 놓인 티파니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고 "티파니가 있네요."라며 우는 장면을 그래서 저희는 조금 장난스럽게 표현했죠.

고백보다는 돈이 될 만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고 좋아했다, 고 발표하는 저희에게 당신은 정색했습니다.


너무 슬픈 일이라고, 이 아름다운 영화를 보면서 어쩜 그렇게 자본주의적 생각을 하고 해석을 했는지에 대해 당신은 필요 이상으로 섭섭해 했습니다.

저희는 너무나 당황했지요. 왜 그렇게까지 이 발표에 대해 저희에게 질책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업을 거듭하며 차차 당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너무 순수한 사람이었죠. 마치 때가 타지 않은 어림 아이처럼요. 또한 감수성이 몹시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수님께 더 호감을 가지게 된 모양입니다. 세상에서 제가 만났던 사람들 중 당신이 가장 순수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상하죠, 또래나 저보다 어린 사람이 아닌 나이가 훨씬 많은 당신에게서 순수함을 느꼈다는 것이요.

그 순수성을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계속 마음이 갔다고 하면 교수님께선 당황하실까요.


수업 중 미쟝셴 단편영화제에 가서 영화를 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교수님도 함께 가서 영화를 보기로 했지요.

당신은 영화관에 처음 가보는 사람처럼 이것 저것 사소한 것을 신기해 했습니다. 팝콘 종류가 그렇게 많은 것에도 신기해하고, 평일 그 시간에 사람들이 그렇게 영화관에 많은 것도 신기해하고, 티켓을 사람이 끊어주는 대신 자판기로 뽑아야만 하는 것도 신기해했죠. 그렇게 소소한 것에도 호기심 어리게 감탄하는 당신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이것저것 알려주어야 하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캐러맬 팝콘을 사다가 드리자, 맛을 보시곤 정말 달콤하다며 마알갛게 웃으셨죠. 아, 그 당신의 붉은빛 입술에서부터 부드럽게 퍼지던 그 미소가 어찌나 달콤하던지요. 저는 아직도 영화관에 가면 꼭 캐러맬 팝콘을 구입합니다. 그 팝콘을 입에 넣으며 그때 본 당신의 미소를 항상 떠올리곤 하죠. 기억속의 그 미소는 언제나 팝콘보다 달콤합니다.


언젠가 당신이 강의 시간에 말씀하셨죠. 한 버스 정류장에서 당신에게, 남루한 차림의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가 다가왔다고요.

깜빡하고 지갑을 집에 두고 왔는데, 자신이 먼 친척 동네에 와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핸드폰도 잃어버려서 그 친척과 연락이 되지 않는데, 부디 버스비를 융통해 줄 수 없겠냐고.

그 아주머니가 아이를 들쳐업고 너무 간절한 표정으로 말씀하셔서, 설마 아기 엄마인데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 라고 생각하셨다고요.

간단한 금액일 줄 알았던 그 버스비는, 아주머니가 먼 지방의 사람이라 금액이 꽤 컸다고요.


그래도 교수님은 좋은 마음에 버스비를 빌려 주시며, 꼭 갚을테니 명함을 달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명함까지 내미셨다죠.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는 아주머니의 태도에서 아, 내가 사기를 당했구나 라고 비로소 깨달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아주머니가 자신의 명함을 이용해서 또 어떤 사기를 칠 지 모르겠다며 허탈하게 웃는 당신의 모습이 참 안타까웠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기엔 너무 맑으신 분이다, 라고 생각했죠.

순수하다는 것은 좋은 겁니다. 이 세상에 교수님같은 사람들도 분명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점을 악용하는 사람들도 물론 많겠죠.


교수님이 말씀해주셨던 학생식당에서의 여학생들의 대화가 가끔 떠오르곤 합니다. 기분이 울적해지는 날에는 문득 그 대화를 전해주던 당신의 얼굴에 어린 그 풍부한 감정을 떠올립니다. 그럼 기분이 좀 나아지곤 했죠.

학생식당에 식사를 하러 가셨는데, 당신의 앞에 선 여학생들이 오늘의 메뉴가 뭔지 서로 조잘조잘 떠들고 있었죠.

와, 어묵볶음에 콩나물국이라니, 너무 맛있겠다며 까르르 웃는 여학생들의 모습에 당신은 눈물이 고였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소한 것에도 너무 기뻐하고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고요.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런 교수님의 말을 전혀 공감하지 못해 잠시 분위기가 고요해졌다가,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지요. 당신은 당황해하며 아니,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그런 너무 작은 일에도 기뻐할 줄 아는 그 만족감이요, 라고 말씀하셨지만 다들 웃었죠. 그때 당신의 목소리에 담긴 그 시원하고 청량감이 도는 기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는 그 대화를 전하는 당신의 표정에서 눈을 뗄 수 없었죠. 당신의 얼굴에 어려있던 그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과 감동받은 듯한 눈망울과 아름다운 것을 본 듯한 입가에 번지는 미소까지, 당신은 정말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요.

하지만 그 때 저는 제가 느낀 그 감정이 뜻하는 바를 잘 몰랐습니다. 바로 알아챘다면 이상했겠죠.

아마 당시의 전 그 감정에 대해 깨닫지 못한 게 당연할 거예요.

고작 스무살이어서 제가 너무 어렸기도 하고......그런 감정이 평범한 것은 아니니까요.

이전 09화 완성, 그 깊이의 책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