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자신만의 사랑이 있다

사랑은 시작과 끝이 만나는 동그라미

by 눈꽃





6월 셋째 주 수요일, 너는 나를 버렸다.

7월 마지막 주 수요일, 나는 너를 버렸다.


너와 처음 만난 건 열네 살 봄이었다. 친구의 친구여서 오며 가며 눈짓으로만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노는 무리도 달랐고 뒤섞여 본 적도 없었다. 교집합이라곤 그저 한 공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아, 저런 애도 있구나 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걸. 왜 나는 너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너는 그런 관심에 반응을 해줬는지. 알게 된 건 열네 살이었는데 제대로 대화를 해 본 건 열여덟 가을이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날,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 없이 우리는 단 둘만 남아 있었다. 나란히 앉아 손장난을 치고 별 거 아닌 것에 낄낄댔다. 저녁에 뭐 하냐는 말을 누가 먼저 꺼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다가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고 매운 불닭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너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대화가 즐겁지 않으면 마음을 열기 힘들고,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내어주던 나는, 그 날 너를 사랑하기로 했다. 흐르는 물처럼 그냥저냥 살아가던 나와 달리 너는 꿈과 목표가 있고 그것을 향해 힘껏 내달리는 사람이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이야기가 즐겁고 신기하고 행복해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걷기에 딱 좋은 날씨 었고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어둠이 있어 사랑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감히 사랑한다는 말을 너에게 해도 되나 두려울 정도로 네가 좋았다. 나는 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너를 향해 다가갔다. 나에게 없는 것이 너에게 있었고, 너에게 없는 것이 나에게 있었다. 잘 맞는 사람, 좋은 친구 그 이상의 관계가 절실했다.


너는 나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고 주저앉아 있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내가 무엇이든 열심히 핼 수 있게 힘을 주는 원동력이었고, 내가 울면 함께 울어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너를 생각하면 목이 턱 막히며 가슴이 아파온다. 어린 시절의 너와 나는, 그렇게 함께 했다.


짝사랑도 아닌 외사랑이었다. 너를 향한 길은 언제나 아슬아슬한 외줄이었다. 한 걸음 내딛는 게 겁나고 떨어져 상처 입을까 봐 무서운, 가느다랗고 흔들리는 긴 외줄. 세월이 갈수록 사랑은 무거워졌고 너에게 다다를 수 있는 길은 길어졌다. 도중에 나는 도망도 갔고, 너를 미워해보기도 했고, 사랑을 다른 곳으로 나누어 덜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모든 마침표 앞에는 네가 있었다. 문장이 끝나고, 다음 문장이 시작되는 곳에 항상 네가 있었다.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걸 수 번 반복한 뒤, 나는 어떤 형태로든 네 곁에 머물기로 했다. 혼자 하는 사랑이어도 괜찮았다. 내가 두 배, 세 배 사랑하면 언젠간 너도 나를 바라보지 않을까 생각하며.


내 미래는 너였다. 너 또한 나에게 그랬다. 너의 미래는 나라고. 열아홉 살에 건네받았던 편지에 똑똑히 적혀 있었다. 아주 먼 미래에 대해 예측할 수 없지만, 거기에 내가 있어주면 좋겠다고. 그 문장 하나에 사로잡혀 나는 20년 가까이 너만 바라봤다. 너는 그 해를 손가락으로 헤어본 적 있을까. 나는 매년 1월 9일만 되면 그걸 헤어보았는데. 몇 년이 지나도 나는 그 날을 기억하고 손가락 하나를 접을 것이다. 몇 년 전까지 그 감정이 사랑이었다면, 지금은 원망 혹은 미움 아니면 그냥 추억으로. 아주 많이 늙어서 지팡이 짚고 함께 에펠탑을 바라보며 와플을 먹는 귀여운 늙은이가 될 때까지 함께 하자는 너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내가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할 테니, 네가 여행 경로를 짜면 좋겠다고. 너와 오손도손 살 날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고 꼬박꼬박 돈을 모았다. 언젠간 오롯이 내 사람이 될 너를 기다리는 게 내 삶이었다.


다 견뎌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너를 내 삶에서 도려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무 지쳐있었고, 너는 지쳐있는 나를 다독여주지 않았다. 위로를 바라고 전화를 했던 6월 셋째 주 수요일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네 곁에 있었을까. 너는 아마 그 전화를 기억하지 못할 거다. 그만큼 너에게는 소소한 일이었고, 나는 그 소소함에 큰 상처를 받았었으니까. 뒤늦게 울며 나에게 미안하다 말하는 너를 보며 나는 이제 정말 끝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 여름밤, 옥상에 나란히 앉아 마지막 대화를 했다. 머리에 염색약을 묻힌 채로 어둠에 앉아 너와의 지는 20년을 떠올렸다. 천천히, 느리게 꼭꼭 씹어 그 긴 시간을 삼켰다. 체하지 않게, 다시는 치밀어 오르지 않게. 너를 사랑하겠다고 결심했던 날의 대화와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날의 대화. 이상하게도 나는 차분했다. 차분하다 못해 잠이 솔솔 올 정도로 나른했다. 약간 몽롱한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고 너를 보냈다. 가는 네 뒷모습을 눈에 담고 또 담으며, 이제 끝이라고 잘 지내라고 들리지 않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 날 물든 내 머리는 핏빛이 돌 정도로 새빨갰고, 그 빨간 물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잘라내고 또 잘라내도 붉은 기운이 자꾸 올라와 너와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아주 잘 살고 있고, 너 또한 잘 살고 있을 거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래야 한다. 내 청춘이 녹아있는 사랑을 네가 온전히 가졌으니. 이 글이 어디까지 퍼져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네가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너는 아마 내 글을 보면 나를 알아차릴 것이다. 너만큼 내 글을 오래 본 사람도, 내 글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기에.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이 있다. 너에게 주었던 글을 나중에 한 번 빌려 달라고. 예쁘게 가다듬고 모아 책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세상에서 딱 한 권밖에 없는 책은 네 손에 있다. 순수하고 열렬했던 사랑이 너에게 있다. 그러니 너는 이 글을 알아보겠지. 잘 지내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도 너를 혼자 사랑하고 혼자 미워하고 있으니. 이 미움이 끝나면 나도 너를 아무렇지 않게 추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 너는 다시없을 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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