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작별 선물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by 구론산바몬드

B양은 다섯 살 아래의 동급생이었다. 약간 톰보이 같으면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170cm 가까이 되는 큰 키에 날씬해서 그녀를 맘에 둔 건 아니었다. 긴 생머리에 얼굴이 예뻐서 그녀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경찰 고위 간부의 딸이라 돈이 많아서 그녀를 살가워 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의 유일한 단점은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거였다.


어느 날 그녀의 남자 친구가 입대한다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첫 몇 달은 편지도 주고받으며 서로를 그리워하겠지. 그러다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는 거야. 내 시나리오는 그랬다. 그의 입대 후에도 그녀는 밝고 쾌활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속으로만 외로웠을까. 술을 사고 밥을 사는 일이 잦았던 것을 보면.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그해 연말께 내가 살고 있던 독서실로 그녀가 찾아왔다. 남자 친구와 이별하고 쓸쓸한 마음에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거겠지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남자 친구를 면회 가려는데 길을 잘 모르니 동행해 달라는 거였다. 그가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으로 배속되었다는 소식에 나도 그곳에서 근무했었다고 말했던 것을 그녀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1박 2일의 면회를 위해 다음날 새벽 이틀 치 우유를 미리 배달했다. 가고 오는 길에 후배에게 밥을 얻어먹을 수는 없었다. 수금한 우유대금을 챙겨 나갔다. 우유보급소에 상납해야 할 돈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 1학년 K양 셋이서 강원도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제대 후 2년 만에 처음 가보는 강원도는 생경했다. 우리는 그의 부대를 찾아 면회를 신청했고, 부대 인근에 방 한 칸을 잡았다. 방값을 내가 치렀다. 아마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여자의 남자 친구를 면회 가서 없는 돈까지 빚내 쓰는 그 더러운 기분이라니.


초저녁부터 삼겹살에 소주 꽤나 마셨던 것 같다. 철없는 K양은 MT라도 온 양 엄청난 식욕을 과시했다. 우울한 기분에 나는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소곤거리는 소리에 살짝 잠이 깼다. 새벽 세시쯤이었을 것이다. K양은 벽에 붙어 코를 골고 있었고 그녀와 군바리가 나란히 누워 소리 죽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윽고 몸이 부대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기 힘들었다.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방을 나섰다. 그냥 계속 자는 척하고 있을 걸 후회가 밀려왔다.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강원도의 매서운 한파를 깜빡했다. 돌아갈 순 없었다. 추웠지만 참고 걸었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뭔가 형언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얇은 옷을 자꾸 바람이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서 논밭밖에 없는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 아침 7시가 되어 방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자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 마음은 그녀를 놓아버렸다. 그녀는 뜨거웠고 나는 추웠던 그날 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며칠을 고민했다. 혼자 좋아하고 혼자 이별을 고했지만 무언가 작별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래야 그녀를 정녕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선물을 살 돈은 없었다.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 선물할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았다. 손재주가 좋았던 나는 집을 떠나 올 때 공구가방을 가지고 왔었는데 거기서 전지가위를 발견했다. 연모의 마음을 끊는다는 상징적 의미의 가위가 아니었다. 그냥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물건이 그것뿐이었다. 가위를 신문지로 곱게 포장했다.


일요일 새벽, 우유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B의 집 앞에 도착해 삐삐를 쳤다. 5시였다. 잠이 덜 깬 B가 아파트 현관에 나타났다. 나는 말없이 선물을 건넸고, B도 말없이 받았다. 그 후로도 나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B와 같이 수업을 듣고 밥을 얻어먹었다. B는 단 한 번도 그 선물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의미 없는 그 선물을 B가 달리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싶다. 한겨울 새벽에 받은 가위라니.... 살인이라도 예고하는 듯 섬뜩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남자 친구가 제대하기 전 B는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그 후로도 서너 명의 남자와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어쨌든 내 시나리오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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