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나온 2000년대엔, 한 때 이른바 '쿨병'이라 불리는 약도 없는 몹쓸 병이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우리 삶 속 여기저기에 침투했었다. '멋지다'와 '쿨하다'라는 말은 세트처럼 쓰였고, 어디에서든 '멋지다'라는 수식어를 달려면, 사랑에도 쿨한 척, 이별에도 쿨한 척,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도, 쿨함을 한 껏 보여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요즘 사람 축에 끼지 못하거나 유행에 좀 뒤처지는 사람, 심하게는' 조선시대 사람이다'라는 둥, '어디 딴 나라에서 왔냐'는 둥 마치 시대에 낙오된 사람 취급을 했었다.
절절히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잘 지내, 그동안 즐거웠어'라고 말하면서 쿨~하게 상대와 헤어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회사에서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고서도 '괜찮아, 어차피 그만둘 거였어'라는 식으로 포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쓰이긴 했지만, 공통점이라면 자신의 아픔이나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태도나 반응에 상관없이 나는 괜찮다는 식으로 둘러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얼마나 쿨했을까? 쿨하다는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고 쓰기나 했을까? 다른 이들 앞에서 애써 강한 척, 괜찮은 척 아무리 하면 뭐하나... 혼자 있게 되거나 혼술을 하면서 이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우리는 모두 한 두 번쯤 쿨병에 걸려봤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쿨함의 화법을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괜찮은 어른이 아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직성이 풀리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거나 어이없이 사랑이 끝나버리는 일을 경험하게 되면, 가슴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기어이 그 뜨거운 것을 뱉어내야만 그나마 속이 풀리는 것 같다.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부당한 일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묻혀 버리고야 마는 진실, 내가 여기 있다고 외치지 않으면 부러 나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세상이 악으로 엉켜있어 영원히 풀지 못할 것만 같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만 같다. 그리고 일정 부분 그렇다고 믿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너무 쿨한 것만큼 너무 뜨거운 것 또한 주의하려고 한다. '어떤 뜨거움'을 감당하기 위해선 많은 용기와 노력,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애씀의 용기나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 시간들을 견뎌내려면 내가 다치는 수고나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에, 이제는 너무 애쓰면서 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용감하게 아무렇게나 '쏘~쿨'을 외칠 수 있는 류의 인간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류의 가벼움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덜어낸 산뜻한 가벼움은 반갑지만, 가벼움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한 없이 가벼운 삶 또한 지양하고 싶다.
이렇게 저렇게 길게 늘어놓았지만, 역시 삶의 균형이 제일 필요하다는 말인 듯싶다.
애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는 않게.
나만의 삶의 방식을 오늘도 찾아내고 있다.
앞으로 내가 살아내고 살아갈 인생에, 애씀도 가벼움도 적당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