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의 첫 산부인과

낯섦 투성

by Lulina


하얀 종이 시트,

줄자,

태아 심음 측정기.


미국 산부인과에서 처음 만난 신기함이었다. 임신 6개월에 도착한 미국이라 의료보험이 생기자마자 산부인과부터 찾아다녔다. 하지만 마음 급한 우리와는 달리 중기 임산부를 선뜻 받아주는 의사가 없었다. 이런저런 수소문 끝에 나이가 지긋한 흑인 여의사를 찾았는데 매번 대기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예약시간으로부터 평균 한 시간의 기다림은 언제나 기본이었다. 정작 진료 시간은 십 분 정도도 걸리지 않았는데, 진료 때마다 익숙지 않은 것들이 가득했다.



진료대는 하얀 종이 시트가 깔려 있었다. 시작부터 그곳에 앉거나 누워 잠깐의 면담 후 온몸을 탐색하며 진료를 시작하는데, 언제나 ‘줄자’ 타이밍이 있었다. 이게 무척 이색적이었는데, 줄자로 배 둘레를 재어 뱃속 아이의 성장을 가늠해 주었다. 그 후에는 아이심장 소리를 들을 시간이다. 의사는 휴대용 기계 하나를 꺼내 내 배에 가져다가 요리조리 아이의 심장 쪽을 찾아 스피커로 심장소리를 들려주었다. 한국에서는 초음파기계로 아이가 주수에 맞게 자라는지, 사진도 요리조리 찍어 여러 장 뽑아주며 심장소리를 들었는데, 여기서는 줄자로 아이의 크기를 가늠하고 기계 달랑 들고 심장소리만 듣고 있자니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렇게 짧은 진료 후 언제나 질문이나 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물어보는데, 매번 궁금한 점이나 할 말이 없던 나를 의사는 의아하게 여겼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 의사의 의아함의 이유를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항상 한 시간씩의 대기시간이 있었는데, 그날은 한 시간이 지나도, 한 시간 반이 지나도 의사가 들어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있는데, 옆방에서 담당의사의 목소리가 나긋히 들려온다. 울음이 섞여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던 옆방의 대화. 옆방 환자는 뭐가 그렇게 속상한지 한참을 울며, 의사에게 소리 높여 무언갈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슨 슬픈 일이 있는 걸까. 우울증이 생긴 걸까. 울음소리에 덜컥 마음이 내려앉았다. 뱃속에 생명이 생기고 나서부터 난 세상과 온전히 연결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 일이 아니길…… 부디 너무 아픈 일이 아니길…… 잘 이겨 낼 수 있는 일이길……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옆 진료실 환자를 위해 짧게나마 온마음으로 기도를 해 주어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그제야 나의 끝없던 기다림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위한 위로의 시간들. 할머니 의사여서였을까. 많은 환자들을 보듬어 주느라 자신의 시간을 쏟아붓는 의사를 보며 낯설기만 하던 이곳이 조금씩 따뜻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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