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브랜레이스 10km 마라톤 후기
달릴 때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생각을 시작하면 뇌는 현재의 고통에 집중한다. 가장 위험한 생각은 저기 가로등까지 참고 뛴다는 식의 발상이다. (그다음부턴 걸으면서 숨을 돌리는 거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그 생각을 하자마자 이 고통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다.
음악은 달리기의 좋은 반려다. 음악을 듣지 않고 뛴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나는 두 개를 거의 동시에 시작했다. (말하자면 음악은 다시 듣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음악이 보장해 줄 수 있는 거리는 그리 길지 않다. 달리는 길이가 길어질수록 음악으로도 달래 지지 않는 지루함이 있고 뇌는 쉽게 경로를 이탈한다.
10km를 달리는 오늘, 내 마라톤의 길동무는 ‘KBS 라디오 문학관’이었다. 그것은 고통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던 내가 팟캐스트에서 신중히 고른 콘텐츠였다. 한국 단편을 아나운서와 성우가 실감 나게 읽어주니 라디오 드라마나 진배없다.
집을 나서며 듣기 시작한 건 K-pop이었다. 요즘 외출할 적마다 듣는 플레이리스트다. 마라톤 출발지점은 항상 신나는 음악으로 들썩하다. 이때 러너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하는데 이건 긴장과 흥분 때문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큰 음량 덕분이다. 이어폰 속의 음악은 잠시 주춤한다.
벡스코에서 촘촘히 출발한 러너들이 광안대교로 오르면서 뛰는 게 한결 수월해졌다. 그곳에서 나는 플레이리스트를 바꿨다. 정지아의 ‘말의 온도’였다. 이 팟캐스트는 단편당 50분에 맞춰져 있어서 실제론 듣다 남은 ‘말의 온도’ 반 토막과 최진영의 ‘홈 스위트 홈’ 절반이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나보다 10살이 많은 오빠가 외지에서 살 때였다. 방학마다 오빠네 놀러 가는 게 인생의 큰 즐거움이었는데, 거기 세계문학 전집 카세트테이프가 있었다. 과거엔 그런 게 꽤 유행이었다. 오빠가 출근한 집에서 나는 그걸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책은 종이책이 제맛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때 문학을 눈이 아닌 귀로 듣는 경험은 퍽 괜찮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었다. 눈보라가 치는 언덕에서 ‘히스클리프’를 부르던 애절한 외침은 내게 ‘폭풍의 언덕’과 동음이의어였다.
‘말의 온도’ 속 주인공은 이혼한 딸이다. 그녀는 고령의 친정엄마를 모시며 자신을 키운 엄마의 뜨끈한 말들을 깨닫는다. 넷플릭스 드라마 ‘홈 스위트 홈’인 줄 알고 읽었던 최진영의 작품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떠올라 흥미로웠다. 전날 종이책으로 읽은 김유담의 ‘돌보는 마음’까지 여러 이야기가 뛰는 중에도 머릿속에서 촘촘히 얽혀 나갔다.
달리면서 듣는 데도 의외로 집중이 잘 됐다. 고통을 잊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에 충실하면서도 고상하고 생산적인 활동이었다. 덕분에 마라톤 연습 시 5km가량을 쭉 달리고 이후는 걷다 뛰기를 반복하던 것과 다르게 오늘은 10km를 쉬지 않고 뛰었다.
지난 연말 도전했던 10km 마라톤을 1시간 안에 들어와 이번에도 그만큼의 기록을 기대했다. 많은 러너가 광안대교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삼익비치 벚꽃 터널로 빠질 때도 묵묵히 뛰었음에도 이번 기록은 1시간 2분 3초. 조금 아쉬운 기록이었다. 그래도 문학적 달리기로 10km를 계속 달린 게 어딘가 싶은 마음도 크다.
결승지점을 통과하자 좀 전까지 욱신거리던 왼쪽 무릎의 통증이 사라진 자리에 진한 탈력감이 차올랐다. 한동안은 횡단보도 신호가 눈앞에서 바뀌어도 절대 뛰지 않을 것이다. 며칠은 인간 나무늘보가 되어 최대한 게으름을 부려줄 테다. 그런 게으른 다짐을 하며 나는 광안리 해수욕장을 떠났다. 부산에 온다는 ‘아주 한낮의 연애’ 김금희 작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