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정답이 있을까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너무 쉽게들 내뱉는 말이 있다.
“너는 운동엔 소질이 없어. “
“음악은 취미로만 해라.”
“이 정도 하는 아이들은 많아. “
겉으로는 현실적인 충고 같지만, 실상은 아이의 가능성을 가두는 말들이다.
아이 안에 숨은 잠재력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씨앗과 같지만, 우리는 그 싹을 내기도 전에 너무 쉽게 짓밟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를 한 방향으로 몰아넣고, 단 하나의 기준만을 강요한다. 마치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레이스의 출발선에 서서 앞만 보며 달려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아이의 성취가 조금만 눈에 띄면, 부모의 기준은 금세 더 높아진다.
“이 정도론 ○○대 못 가. “
“이 정도로는 학교 대표도 못 뛰어.”
그 말 한마디는 너무 쉽게 흘러나오지만, 아이의 마음속에는 오래 남는다. 자존감은 조금씩 깎이며, 그와 함께 아직 자라지 못한 가능성마저도 움츠러들 것이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을, 향기가 없다는 이유로 꺾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어릴 적 꿈이 있었다. 책을 읽는 게 좋아 참 많이 읽었다. 아버지는 책을 읽으면 늘 독후감을 쓰게 했다. 그 글들을 묶어 작은 책으로 제본해 주실 만큼 자랑스러워하셨다.
자연스럽게 글쓰기는 나의 기쁨이 되었다. 백일장에 나가면 늘 상을 받았다. 어느 날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너만큼 쓰는 아이들은 많아. 차라리 공부를 해. “
고등학교에 들어서는 음악에 빠졌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도 했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디션을 보고 학교 밴드의 보컬이 되었다. 실용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 말도 단칼에 잘려나갔다.
“노래하는 사람은 수두룩해.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데,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잘하는 공부를 하지 왜.”
어른이 된 나는 알게 되었다.
세상은 가능성을 평가하기 전에, 그것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창의적이고 신나는 꿈은 늘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가위질이 되어야 하고, 결국 나는 양 떼처럼 울타리 안에 몰려 누구나 가는 길 위에 서야 했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선택할 기회는, 그렇게 봉인되어 버렸다.
한 번쯤 이런 말을 듣고 싶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많지만, 너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있을 거야. “
“노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네 음색은 특별해.”
“그림 그리는 사람이 많아도, 네 색감은 다르니까.”
이런 말들은 아이들의 존재의 인정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미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길을 걷고 있으며, 그 길 위에서 매 순간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특별함’은 거창한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데서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 앞에 그 진실을 자주 잊는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한 줄 세우고, 정답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으로 몰아넣는다. 그 과정에서 아직 피어나지 않은 가능성은 자라기도 전에 잘려 나간다.
진정한 교육이란, 아직 쓰이지 않은 잠재력을 지켜주고, 스스로 꽃필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격려는, “너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
부모로서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멋대로 살아도 괜찮아.
멋대로 그려도 괜찮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해.
너만이 살 수 있는 삶은,
그 자체로 이미 특별해.
네가 남긴 글, 네가 그린 그림, 네가 내뱉은 목소리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너의 고유한 삶의 흔적이 될 거야.
왜냐하면 그 삶은 오직 너에게서만 시작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