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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결혼예찬 05화

4화. 서프라이즈 선물이 싫은 TT부부

비효율적 낭만을 내려놓다

by 아타마리에

물질과 낭만의 효율

어떤 관계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사랑을 증명하려 한다.

SNS에 올라오는 명품 가방, 보석 등 값비싼 선물 사진은 때때로 선물의 크기가 곧 사랑의 크기인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기념일의 특별한 선물은 때로는 관계의 온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고, 사람들은 그 작은 물질을 통해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나 물질이라는 것은 양날의 검처럼 아이러니하다. 물질에 매겨진 값이 때로는 진심이라는 본질을 가리기도 한다. 그래서 진심이 담긴 선물도 가격 때문에 곡해될 수 있고, 진심이 없는 선물도 잠시나마 환심을 사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게다가 사랑의 언어가 선물이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 선물이 가진 가격과 내재된 의미가 때로 어긋나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 낭만적 의무감이 낳는 비효율을 내려놓았다.


우리 부부는 기념일에 선물을 주고받지 않는다. 이는 사랑의 결핍이 아니라, 관계를 더 오래 지속시키기 위한 나름의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 과도한 기대가 때로는 관계의 투명성을 흐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에게도 서로를 감동시키기 위해 애쓰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느끼게 되었다. 관계의 본질은 짧은 순간의 놀라움이 아니라, 변치 않는 일관성이라는 것을.

사실, 결혼 전, 나는 남편에게 화려한 프러포즈 대신 주물 냄비를 선물해 달라고 요구했다. 수많은 냄비가 그러하듯, 매일 식탁을 채우는 이 냄비가 단지 한때의 이벤트가 아닌, 우리의 긴 결혼 생활을 상징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결혼 준비에 한창이던 어느 날, 남편은 그 무거운 냄비를 배낭에 넣고 매고 프러포즈를 하러 나타났다. 무거워 보이는 가방 덕에 서프라이즈는 더 이상 서프라이즈가 아니었지만, 우리에겐 무엇보다 의미 있던 순간이었다. 14년 동안 묵묵히 제 할 일을 해온 주물 냄비를 보면 그날의 행복한 순간이 떠오른다.

우리의 비효율적 낭만에 대한 거부는 그렇게 아주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낭만적 기대의 해체

선물을 멈춘 이유는 두 가지 낭비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첫째는 금전적 낭비이다. 우리는 필요한 것이나 가지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기념일이 아니더라도 서로 동의하에 언제든 소비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매일 붙어사는 부부에게 필요한 물건은 특별한 날을 기다릴 필요 없이 언제든 함께 살 수 있는 일상의 영역에 속한다. 원치 않거나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기념일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사서 창고에 넣어두는 비효율적인 소비를 거부했다.


둘째는 더 치명적인 감정적 낭비였다.

물질적 선물은 관계에 복잡한 기대와 죄책감을 심는다. 연애 초, 내가 남편에게 선물했던 셔츠 한 벌은 지금도 옷장 속에 손대지 않은 채 걸려 있다. 나는 그 셔츠를 꽤 값비싸게 샀기에, 남편이 그 금액만큼의 만족을 표현해 주길 내심 바랐다. 물론 남편은 “내 선물이라 평생 간직할 거야”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속에서 약간의 난처함과 미안함을 읽었다. 그는 셔츠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내가 지불한 값어치에 미안해서 그 진심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의도로 고른 선물이 엇나가면, 주는 사람은 투자한 돈과 기대치만큼 실망하고, 받는 사람은 미안함과 거짓으로 인한 죄책감을 느낀다. 우리는 선물을 통해 물질의 노예가 되어가는 이 씁쓸한 순환을 끊기로 했다. 서로의 취향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좋아할 거야'라는 추측과 '금액만큼 만족하겠지'라는 기대로 고른 선물들은 결국 둘 다를 피곤하게 만들 뿐이었다.




합리적 기념일의 탄생

우리는 선물을 주고받지 않는 소극적 결정을 넘어, '무엇으로 기념일을 채울 것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원칙을 세웠다. 기념일만큼은 물질이 아닌 의미로 채우길 바랐다.

그래서 남편과 동의하에, 우리만의 두 가지 기념일 의식을 만들어 지켜왔다.


신혼 초에, 나는 남편에게 매 기념일마다 한 통의 편지를 써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한 해 동안의 감정과 성찰을 글로 정리해 전하는 일은 감정의 투명성을 회복하는 동시에, 언어로 서로의 정신세계를 공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말은 쉽게 휘발되지만 글은 오래 남기에, 매번 정신없이 바쁘고 잘 잊는 우리에게 1년의 추억을 보관하는 귀중한 기록이 된다.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나는 한 해를 되돌아보고, 우리가 함께 견딘 순간과 고마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감정을 정리한다. 글을 쓰는 것이 익숙지 않은 남편의 편지를 읽을 때면, 나는 그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새삼 다시 알게 된다. 일상 속에서는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편지 안에서는 솔직하게 드러난다. 벌써 우리 부부의 편지함에는 결혼기념일을 포함한 특별한 날마다 주고받은 편지들로 가득하다. 이것은 선물을 넘어서,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과 같다


우리는 기념일마다 함께 와인을 마신다.

매년 우리는 30~50달러대의 와인을 한 병 함께 고른다. 그리고 그 병을 1년 동안 묵혀 두었다가, 다음 해 기념일에 나눠 마신다. 나는 농담조로 같이 마시려면 1년을 더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1년이라는 시간이 우리 부부에게 어떤 어려움을 줄지, 어떤 평화를 회복할지, 어떻게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될지는 모르기에, 1년이 지나 함께 나누는 한잔은 그만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와인은 한 해를 살아낸 우리 관계의 시간표이자 타임캡슐과 같다.


곧 다가오는 결혼기념일에는 작년에 사둔 피노누아를 마실 예정이다.

그 병 안에는 단지 와인뿐만이 아니라 한 해동 안의 대화와 인내, 그리고 서로를 향한 믿음이 천천히 숙성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 그 병을 열며, 우리는 지난 1년을 살아낸 자신과 서로를 축하한다.

기념일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낸 시간을 다시 약속하는 갱신의 날이다.




관계의 본질

우리 부부가 기념일을 보내는 방식은, 물질이 주는 오해를 차단하고, 마음을 주고받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선물은 늘 고맙지만, 선물이 모든 의미를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편지는 어떤 선물보다 무겁고, 와인 한 잔은 지난 시간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 선물을 좋아할까? “라는 불확실한 기대 대신, ”이것이 우리가 함께 걸어온 시간이다"라는 확신이 들어있다.


선물의 진정한 의미는 마음에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마음을 물질로 증명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반응하게 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선물을 받고도, 그것이 상대의 진심이라 믿어야 하는 묘한 사회적 의무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는 그 의무를 거부했다. 사랑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소비의 지표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의 기념일은 낭만 대신 신뢰를 기념한다. 오해를 낳는 선물의 교환 대신, 다른 방식의 정신의 교환을 택했다.


14년을 살아보니 알게 되었다. 사랑의 본질은 놀라움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에 있다. 진짜 선물은 물질이 아니라, 매년 조금씩 단단해지는 관계 그 자체다. 그리고 그 관계는, 서로에 대한 투명한 이해 위에서 오래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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