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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진 Jan 05. 2022

첫 연장근무를 했습니다(feat. 대설)

백신 맞은 거예요. 하하.

여기저기 울리는 캐롤을 떠올리면, 코로나 덕분에 다들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캐롤을 감상하고 있겠으나, 이상하게도 눈이 하얗게 내리는 거리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 같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름만 들어도 두근두근 설레는 겨울의 특별한 날이다. 그렇지만 우리 팀 관제사의 업무강도는 그냥 내가 대충 느끼기에도 눈이 오면 평소의 약 세 배 정도는 가뿐히 넘어가니, 화이트 크리스마스란 특히 비행장 관제사에게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누구에게는 한없이 평화롭고 소중한 징글벨 징글벨이 징글징글해지는 시기가 다가왔다.



징글벨.. 징글벨.... 징글징글......



눈이 오는데 왜 관제사가 힘들까. 천천히 생각해보자.


첫째로, 항공기 동체 위에 눈이 쌓이면 그 눈을 치우기 전까지 비행기는 이륙할 수가 없다. 특히 주 날개와 꼬리날개의 경우 비행기가 붕- 뜨는데 반드시 필요한 '양력(lift)'이라는 힘을 얻기 위해 정교한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는데, 눈이나 얼음이 그 위에 붙어버리면 이 '양력'이 제대로 발생하지 않는다. 눈과 얼음은 양력을 줄이고, 항력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안전한 비행을 크게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이 눈과 얼음을 반드시 녹이고 : '제빙', 게다가 다시 얼어붙지 않도록 : '방빙'도 해야 한다.


이어서, 인천공항은 항공기가 이 제빙과 방빙을 특정 '제빙 주기장' 내에서만 진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냥 터미널 주기장에서도 제방빙하고 이륙 준비를 하기도 한다던데, 우리나라는 제방빙용액 등 폐수 처리 관련 문제 때문에 제방 주기장을 따로 설계하고 그 안에서만 제방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현 시각 기준으로 인천공항에는 총 스물아홉 개의 제빙 주기장이 존재하지만,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열 곳이 조금 넘는다. 그래서 눈이 올 때 비행기가 이륙하고 싶다면 터미널 주기장에서 이 제빙 주기장까지 이동한 후, 제방빙 용액을 뿌리고, 활주로까지 다시 이동해야 한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관제 절차도 복잡해진다.


그런데, 우리 팀 관제사가 비행기를 이 제빙 주기장까지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적절한 배치를 위해서 제방빙 순서를 정하는 것도 우리 몫이다. 그러니까 평소 같으면 <터미널 주기장-활주로-이륙>으로 이어지는 간단한 관제 코스가 눈만 오면 <터미널 주기장-제방 주기장-제빙-활주로-이륙>으로 변신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비행기만을 위한 절차도 복잡해지는데, 처리해야 할 게 이 관제교신뿐만은 아니다.


무엇이 더 있냐 하면, 눈이 오면 도로가 얼어붙는 것과 같이 비행기가 지나다니는 공항 유도로에도 눈이 쌓이고 심지어는 얼어붙는다. 따라서 유도로 제설작업 또한 같이 해줘야 한다는 게 문제다. 인천공항의 안쪽의 유도로 길은 깨끗하게 닦여 있어야 비행기가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지나다닐 수 있다. 근데 이 제설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특히 활주로와 근처의 평행 유도로는 제설작업 시 우선순위가 되어 차량도 장비도 많이 투입되지만, 주기장 근처의 계류장 유도로는 그 길이와 규모에 비해 제설차량이 덜 투입되기도 한다.


구질구질하게 길게도 적어놨지만 결론은 한 가지다.

"눈 오면 무지 바쁩니다."





다행히 크리스마스는 비켜갔지만, 얼마 전 주간 근무 날에 이번 동절기 처음으로 인천공항에 꽤 많은 양의 눈이 쌓였다. 눈이 오면 공항에서 근무하는 모두가 바빠진다. 특히 우리 팀의 경우는 눈이 올 때 vs 눈이 안 올 때의 근무강도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여서, 관제탑 창 밖이 하얗게 변신하면 관제탑에 있는 모든 인원이 예민 보스가 된다....(고 들었다). 물은 흐르고, 구름도 가고, 시간도 달려 나가는구나 하며 이너 피스를 유지하는 나 또한 예외 없이 그 예민 보스가 될 거라는 사실을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날 눈 내리는 공항. 슬로모션



오전에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평화로운 관제실에서의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예보에 따르면 강설 시작시간은 오후 한 시쯤이었다. 갑자기 창 밖으로 엄청나게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게 얌전히라도 내리면 좋은데, 저시정까지 겹치면서 바깥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눈이 오는 데다가+저시정이고+유도로 위에 눈이 쌓여 등화시설과 마킹이 보이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정도까지 되니 도저히 정상적인 관제 흐름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저기 저쪽 제방빙장으로 들어가라는 지시를 준 항공기는 유도로 선도 안 보이고 등화도 보이지 않아서 제방빙장 진입이 어렵다고 답했다.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이 완벽히 들어맞는 상황에 부닥쳤다.


그래도 교통량이 크게 많지 않아서 대설을 겪어보지 못한 나 같은 잉여인력도 다행히 그 상황을 어떻게든 컨트롤할 수 있었다. 한바탕 눈이 몰아치고 지나가니 이제 띄엄띄엄 있는 출발기를 신경 쓰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도 현장에는 사람이 계속 필요해서, 평소보다 4시간 더 타워에 있어야 했다. 말로만 듣던 연장근무를 직접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한바탕 눈이 지나가고, 눈이 오는 날에 제빙을 거의 처음 해봤다는 내 말에 우리 팀 대리님은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도 내가 겪을 그 수많은 대량 제빙을 예견하듯이,

"예방주사 맞았네요.ㅎㅎㅎ"


내가 휴일인 날에만 로맨틱한 눈아.....(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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