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갔습니다.
신혼집의 전세 대출 만기가 다 돼가서 은행에 방문했다. 폭풍같이 선거를 치르고 모처럼 특별휴가를 쓴 날이었다. 무려 오전 11시까지 늦잠을 자버렸다. 학창 시절 이후 이렇게까지 늦잠을 잔 건 드물었는데. 대충 9시쯤이겠거니 하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머리가 띵했지만 부랴부랴 씻고, 재택근무하고 있는 남편과 점심밥도 챙겨 먹고, 옷을 갈아입고서는 은행으로 향했다. 요즘 전세 대출 만기가 점점 다가와서 은행에 한번 가야지 가야지 하며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전세 대출을 갈아타야 하는데.. 대출이 얼마나 나오려나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상담을 한 번 받아보고 싶었다.
직장인이라면 대부분 그렇듯 나의 근무 시간과 은행 업무시간이 비슷하기에, 평일에는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는다. 요즘은 코로나로 은행이 단축근무를 하여 더욱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 그래서 은행에 가려면 연가나 반가를 사용하여 모처럼 시간을 내서 가야 한다.
'내가 매일 아침 출근하는 행정복지센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시간을 내서 오시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행히 집 근처에 주거래 은행이 있어 금방 은행에 도착했다. 들어서자마자 민원대가 쭈르륵 나열되어있는 모습이 마치 우리 행정복지센터 같았다. 어쩐지 살짝 긴장되는 마음으로 손 소독을 하고 번호표를 뽑고 잠시 기다리니 금세 내 차례가 왔다. 친절한 미소로 인사해주시는 은행원 앞에 앉았다.
아토 "전세 대출 상담하려고요."
은행원 "아...."
(뒤 쪽 대출창구 남자 직원과 눈빛을 주고받는다.)
은행원 "그거는 중앙회에 가셔야 해요..! 제가 번호 알려드릴 테니 연락해보시고 가세요."
아토 "아.. 여기는 전세대출 상담을 안 하나요?"
은행원 "네 전세대출 상품이 아예 없어요.."
아토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적어주신 중앙회 번호를 받아 들고 은행을 나왔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덜컥 집에서 제일 가까운 은행에 가버린 나의 은행 투어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어쩐지 허무했다. 은행에 갈 거라고 모처럼 쉬는 날 시간을 내서 왔는데, 은행에 들어선 지 5분도 되지 않아 용무가 끝나버리다니.
차에 돌아가서 건네받은 중앙회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금요일 오후 2시는 전화 대기가 상당히 길었다. 예상 대기 시간 15분 끝에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아토 "안녕하세요. 기존 전세 대출 만료가 되어가서 새로운 전세대출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은행원 "대환 대출 말씀하시는 거죠? 그러면 혹시 전에 어떤 대출을 하셨을까요."
아토 "지금은 남편이 중소기업 청년 전세대출받고 있어요~"
은행원 "그러면 2년 더 연장하실 수 있는지 먼저 알아보시고, 연장이 안되시면 보금자리 대출로 전환되는지 알아보세요. 전세금 변동 없이 재계약하시는 거면 일반 은행에서는 대환 대출 잘 안 해주실 수 있어요~"
아토 "아 그렇군요.. 중기청 연장 조건에 안 맞을 거 같아서 다른 대출 알아보려 했는데.. 이런 경우 대환 대출은 잘 안 해주는군요.. 먼저 중기청 대출해 준 은행에 알아볼게요. 감사합니다~!"
전화 대기하며 중앙회 은행으로 달려가는 와중에 상담원과 연결되었다. 상황을 말씀드리니 위와 같이 대답해주셨다. 아.. 먼저 기존 대출을 받은 은행과 이야기를 해봐야 하는구나. 내가 너무 몰랐구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은행으로 달려가 상담을 받아보려 했으니. 스스로가 조금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은행으로 달리던 차를 돌려 집으로 왔다.
그런데 이 상황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 문득 행정복지센터 민원대에서 일할 때, 내 앞에 앉으시는 민원분들이 생각났다. 행정복지센터에도 본인이 신청하고자 하는 서비스에 대해 잘 모르고 오시는 분들이 있다. 그냥 오셔서는 대뜸 받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포괄적으로 물어보시기도 하고, 서비스명을 잘 모르고 오셔서 스무고개 하듯 이것저것 물어보며 알아맞히기도 하고, 이미 받고 있는 서비스인지 모르고 또 신청하러 오시기도 한다.
그래도 이왕 오셨으니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신청이라도 하고 가시면 다행이지만, 해당사항이 없거나 이미 받고 있거나 하면 시간을 내서 찾아온 온 보람도 없이 돌아가야 한다.
내가 민원인의 입장이 되어보니 이 상황이 조금 허탈했다. 미루던 숙제를 해결하러 부푼 마음을 가지고 외출했는데 한 번은 5분 만에, 또 한 번은 전화로 바로 거절(?) 당하니 약간 허무하달까. (물론 잘 알아보지 않은 내 불찰이지만.) '나에게 해당사항이 없다고 안내받은 민원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역지사지의 심정이다.
그리고 또 생각해보면 해줄 수 없는 서비스를 문의하는 민원을 받은 은행원분들도 황당했을 거다. 민원대 안에서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주말을 지나 월요일에 다시 출근했다. 늘 민원대 안의 모습만 보였는데 이번엔 새삼 민원대 밖의 모습이 보였다. 일부러 시간 내서 행정복지센터에 오고, 번호표를 뽑고, 차례를 기다리고, 드디어 담당자 앞에 앉는 민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나도 어디선가는 민원인이지. 지금은 잠시 민원대 안에서의 직원 역할을 수행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