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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십 Oct 31. 2020

엄마 아빠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홍콩 이탈리안 맛집, PICI



며칠 전 엄마, 아빠의 연애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엄마, 아빠가 사랑하는 사이였어?”


맙소사.


태어나고 보니 엄마와 아빠로 불리는 존재들이 있었고

누구보다 이 세상에서 본인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실은 그 둘이 서로 죽고 못 사는 사랑하는 사이였다니.


아이 입장에서도 충격이었겠지만

아이의 질문에 되려 내가 더 충격이었다.


1년 반 연애와 6개월의 결혼 준비 기간을 거치며

신혼 생활 2년만에 가진 우리 아이.

축복이었고 기쁨이었지만

동시에 아기자기 소꿉놀이의 종말을 의미했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터널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유난히 몸이 약하고 잠 투정이 많던 아이.


한밤 중에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수유하며

업고 달래며 간신히 재웠는데

늦은 회식에 그제서야 귀가한 남편의

비밀번호 소리에 아이는 다시 깨서 칭얼거리고.


남자들 군대이야기 만큼이나

끝도 없이 떠들어 댈 수 있는

몸도 마음도 아팠던 눈물 범벅 좌충우돌 육아기.


집에서는 육아로

회사에서는 실무 책임자였던 6년차 과장으로

그야말로 24시간 전쟁이었다.


그러다보니 매번 아이 앞에서 투닥거렸나보다.

서로 사랑했던 사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서로가 서로에게

할 말 못 할 말 선 넘어가며

때론 누가 더 오래 버티나 신경전도 벌이다가

가끔은 아이처럼 아이 앞에서 울기도 했다.


그러니 아이 눈에 비친 우리는

길거리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인

아무 관계도 아닌, 도저히 사랑하는 사람이라곤 믿기 힘든

그저 남자 A씨와 여자 B씨였나보다.


한번도 아이 관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비칠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꿀 떨어지는 눈빛만 사랑이 아니라

함께 울고 웃고 싸우고 하는 모든 시간들도

서로 사랑했기에 쌓아 올릴 수 있는 시간이었고

사랑의 모습은 그렇게 14년의 세월과 함께

변해가는 게 자연스럽다 생각했는데.


아니,

어쩌면 유년기 엄마, 아빠의 부부싸움을 보고 자라면서

나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부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일상인 줄 알았는데


엄마, 아빠가 듬뿍 쏟는 사랑으로만 사랑을 배운 아이,

어여쁜 공주님과 멋진 왕자님이 썸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하면서 끝을 맺는

동화 속에서 사랑을 배운 아이에게

우리의 현실은

사랑과는 저멀리 동떨어진 것 쯤으로 보였을 수 있겠다.


그래서 시작했다.
우리 부부만을 위한 시간,
단 둘이 하는 데이트


뭘 입을까 고민하며 여름 옷을 한참 솎아내다

그래, 간만에 남편이 좋아하는 옷을 입어야겠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PICI.

눈 앞에서 직접 생면을 뽑아주는 센트럴 지점만 가다가

이번엔 완차이 지점을 가보기로.


Francis street 골목길로 꺾어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고 나니

저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코로나 시국에 대기가 웬말인가.

예약도 받지않고 오로지 선착순 입장만 가능했다.


기다리기 귀찮아 다른 식당으로 갈까 했지만

그래, 기다려보자. 완차이점엔 특별한 게 있나보다.

센스있게 친환경 종이로 만든 마스크 케이스.

PICI는 홍콩에서도 혼조, 토쿄리마로 유명한 레스토랑 그룹, PIRATA 소속이다.


PIRATA 그룹이 좋은 점은 꽤 괜찮은 퀄리티의 메뉴를

합리적인 가격에 내놓는다는 것. 그리고 직원들이 항상 웃으며 기분 좋게 일한다는 것.


예전 파리의 유명 이탈리안 레스토랑 갔을 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레스토랑의 주인은 고객이 아니라 직원들이었다.

일하다가도 함께 이탈리아 노래를 목청껏 크게 부르고

흥에 겨워 서빙하다가도 춤 추기도 하고

즐겁게 일하는 그들의 긍정적인 열정 에너지가 손님들

모두에게 전해지며 미소로 번져나갔다.


PICI도 그랬다.

이 곳에서 일하는게 재밌고 자부심 느끼고 그런게 눈에 보여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항상 알아서 골라 달라고 하는 남편.

입맛이 바뀌었나보다 했다. 근데 이젠 안다. 날 위해 맞춰주고 있는 거라는 걸. 그러자 아니라고.

연애 할 때만 해도 느끼한 건 입에도 못 대는 한식파였는데 지금은 파스타가 너무 좋단다.


오픈 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도란도란 이야기 하다, 갑자기 흩뿌리는 비로 주제를 넘기다

마지막엔 10년도 더 된, 이불킥 만 번은 했을 연애 이야기를 장난스럽게 꺼내며 식사를 마쳤다.


아이가 있을 땐 아이가 우선이라 몰랐는데
아이의 빈자리를 우리의 이야기로 가득 채우니
그 자리가 새삼 크게 다가온다.


고마워. 감사하고 또 미안해.

쑥스러운 마음에 스치듯 이런 말도 했던 것 같다.


그래, 우리는 보통 사이가 아니지. 무거운 현실에 우리의 처음은 잠시 저 깊은 곳에 가라 앉아 있을  뿐이었다.


PIRATA 그룹의 카피가 참 좋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랬으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마르셀처럼

마들렌 한 입에 오늘의 함께 한 순간을 떠 올렸으면.


큐 하는 소리와 함께

PICI 데이트 회상 씬으로 넘어가면 좋겠다.


그렇게 시작하는 우리 둘 만의 이야기.

장르는 액션 스펙터클 판타지 보다

지루할만큼 잔잔하고 소소한 일상으로 가득찬

로맨스 영화였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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