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
나의 근원은 경상도에서 태어난 여자다. 태어나고 자란 곳, 나의 감수성과 내적 경험을 형성해 온 곳이다. 그곳에서 고등교육을 끝내고 타지로 혼자 왔다. 대학교 1학년 때 심리학 수업 중 팀별 상담이 있었다. 하얀 종이 위에 그리고 싶은 거 아무거나 그려보라고 했다. 푸릇푸릇한 초원 위에 빨간색 삼각 지붕의 벽돌집을 그려놓고 가운데 큰 느티나무 하나를 그려 넣었다. 교수님은 다른 친구들의 그림에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린 그림에는 사람이 없다고 하시며 많이 외롭게 느껴진다고 하셨다. 당시 나는 고향을 떠나 타지로 유학 나온 상태였다. 스무 살, 첫 사회생활을 오로지 혼자 이겨내고 있었기 때문에 서툴고 어려웠다. 사람이 그립고 사랑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림 하나로 아직 잘 모르는 친구들 앞에서 나를 들켜버린 같아 순간 창피한 마음도 들었다.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교수님은 친구들에게 나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 5가지를 적어보라 하셨다. 그 단어가 다 생각나지는 않지만 공통적으로 포함되는 게 '다정하다'였다. 상담을 하면서 교수님은 내게 참 다정한 성향을 가졌지만 고민을 혼자 끌어안으려 한다 하시면서 다정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고민이나 말하고 싶은 건 털어놓으라 하셨다. 평소 나에 대해서 말하는 거에 습관이 되어 있지 않은 터라 나를 말하기가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늘 다정한 말 한마디에 목말라했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가족들 틈에서 그나마 나는 곰살궂은 성향을 가졌다. 내가 표현하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 사랑의 표현 때문에 혼자 속앓이도 많이 했다. 나는 이만큼 다가가는데 왜 이만큼 해 주지 않는가에 대한 괴로움이 생겼다. 그 첫 번째가 말투에서 비롯된 오해와 그로 인한 상처들이었다. 한두 번 그러다 보니 습관이 되었고 갈등이 쌓였다. 살가운 나는 점점 없어져 갔고 과거에도 다정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정하다는 말을 내뱉으면 그 소리가 한없이 따뜻한 공기가 되어 햇살처럼 포근하게 느껴진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투는 말하는 이도 기분 좋고 듣는 이도 참 기분 좋게 만든다. 가족들에게 다정한 말과 말투를 원하면서 내가 이만큼 노력했는데 원한만큼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작 나는 가시 돋친 말만 하고 있었다. 가는 말투가 고와야 오는 말투도 고울 텐데. 우리 가족이 '경상도 사람이라 원래 그래'라고 하기엔 다소 격한 말투로 인한 오해와 회복되지 않는 말도 많았다. 안 그런 경상도 가족도 많으니까. 앞으로 부모님에게 말할 땐 꽃 같은 말투로 동생들에게는 솜사탕 같은 말투로 나부터 먼저 다정하게 말하고 볼일이다. 익숙하지 않아도 익숙해질 때까지 다시 포근한 가족의 일원이 되어야겠다.
스무 살 그때의 나는 친구들이 말한 것처럼 진짜 다정한 사람이었을까? 지금 나에게서도 찾을 수 있는 모습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다정]
정이 많음. 또는 정분이 두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