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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디귿 Apr 11. 2021

신성일과 엄앵란

모모의 초단편소설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한국 영상자료원'>


    이 지방의 절세미인이 우리 할머니라고 했다. 할머니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두고 할머니를 빼닮았다고 했다. 흐릿한 흑백 사진 속에 할머니는 모던 걸처럼 멋진 모자를 쓰고 있었다. 깃이 없고 소매가 없는 원피스는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 몸의 곡선을 도드라지게 했다. 진주 목걸이를 한 할머니의 모습에 컬러를 입히면 지금 사람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 옛날 무성영화 속 주인공 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할머니는 여든이 훨씬 넘었는데도 여전히 곱게 화장을 하신다. 화장하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할머니가 젊은 시절 얼마나 당당하고 멋진 여성이었을지 가늠하게 해 주었다. 빨간 립스틱을 정성스레 바르실 때는 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할머니는 예전부터 친구분들과 약속이 있을 때 항상 나를 데리고 다니시길 원했다. 차를 운전하게 된 이후로는 시간이 맞으면 줄 곧 할머니를 모셔다 드렸다.

    "손녀가 할매를 꼭 빼닮았데이."

    "지 할매보다 인물이 낫구만. 아이고 예뻐라."

하며 친 손녀처럼 대해주셨다. 할머니는 그 말이 듣고 싶었는지 나와 동행하는 걸 뿌듯해하셨다. 보통은 인근 카페에서 할머니를 기다렸는데 어떨 때는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친구분들은 그때마다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거 할매가 진짜 멋쟁이었데이. 우리가 동화사라도 갈라치면 남학생들이 줄을 서서 따라왔다카이. 편지도 많이 받고 선물도 많이 받았는데 너거 할매가 진짜 눈이 높아가 다 차뿌렸데이. 그래서 시집도 우리 중에 제일 늦게 갔다 안카나. 그때 너거 할매가 막 외국 여자처럼 하고 다녀가 별나다 했다카이. 우리가."

친구분들은 할머니가 예뻐서 콧대가 높았다고 했다. 좋다고 쫒아다니는 사람 다 마다하고 제일 늦게 지역 유지의 외동아들 재혼 자리로 시집갔다고 했다. 그나마 이뻐서 돈 많은 집에 시집 잘 갔다고 했다. 다 늙어서 숨길 것도 없고 살아보니 돈 많은 게 최고라며 나를 보고 더 늦기 전에 얼른 돈 많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라고 했다. 우스겟 소리로 넘겼지만 할머니는 조금 불편해하는 모습이었다.

    "뭐 할라꼬 그런 얘기까지 하나. 미쳤는가베."


    가족사진을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멋쟁이셨다. 두 분 모두 인물이 좋고 차림새도 깔끔해서 고생 없이 생활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런 뒷이야기가 있는지는 몰랐다. 태어났을 때부터 한 집에 같이 살았지만 할머니의 인생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었다. 문득 할머니의 사랑이야기가 궁금해져 할머니 방으로 갔다.

    "할매, 재혼 자리면 어떻나. 백년해로 하는 게 중요한 거지. 안 그렇나."

    "별 지랄을 다 한다."

    "할매, 할부지도 진짜 멋있잖아. 할부지가 아마 안 돌아가셨으면 지금도 멋쟁이 양복 쫙 빼입고 동성로도 나가고 백화점도 가서 할매 옷도 사 오고 그랬을 건데. 나는 요즘 시대에 할부지하고 할매가 태어났으면 영화배우가 됐을 것 같다. 진짜 신성일, 엄앵란 저리 가라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제일 나이 많고 유명한 커플이 신성일, 엄앵란이었기에 아무 생각없이 말했다. 할머니는 그 말이 웃겼는지 호탕하게 한 참을 웃었다. 

    "니가 신성일, 엄앵란도 아나? 맞데이, 신성일 엄앵란보다 대구에서는 우리가 최고였다. 우리가 멋있게 입고 팔짱 딱 끼고 나가면 사람들이 막 다 쳐다보고 그랬데이.

    "할매, 그럼 사진 좀 보여줘 봐. 뭐 꼼 쳐놓은 사진 없나?"

할머니는 자개가 화려하게 놓인 문갑을 열었다. 할머니는 부지런하고 치우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방도 단정하고 청결했다. 엄마가 시집올 때 해온 자개장과 문갑은 4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마모된 부분은 있을지언정 겉은 새것처럼 깨끗하고 빛이 났다. 

    "얼씨구. 자 봐라."

할머니가 보자기 하나를 꺼내 던졌다. 보자기를 펼쳐 보니 복숭아 같은 한 여인이 거기 있었다.

    "우와, 우리 할매. 이뻤데이"

    "머라카나. 지금도 이쁘구마."

빛바랜 낡은 사진 속에 할머니 모습은 지금 내 모습보다 훨씬 아름답고 예뻤다. 눈이 내린 속리산 정이품송 나무 아래 멋진 코트와 가죽장갑을 끼고 찍은 사진, 해운대 바닷가에서 플리츠 치마 바람에 날려가며 선글라서를 끼고 활짝 웃는 모습. 모델들 부럽지 않은 의상과 포즈로 젊은 날을 빛내고 있었다.

    "이 할매 꿈이 모델이었는데. 아이고, 인제 죽을 때 다 돼서 아쉽데이."

    "할매, 아직 죽을라만 멀었다."

할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궁금해서 들어갔는데 옛날 할머니의 멋쟁이 모습에 매료되었다. 할머니의 사랑이야기는 차츰 듣기로 하고 사진 속 아름다운 할머니의 모습을 나만 보기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할매, 아빠하고 엄마도 이 사진 봤나?"

    "몰라. 봤는가 안 봤는가."

    "와~ 할매, 이건 진짜 사기다. 이건 나만 보기 진짜 아까운데. 내 인터넷에 올려도 되겠나?"

    "인터넷? 거기 뭐할라꼬."

    "뭐 하긴. 우리 할매 이쁘다고 소문낼라카지."

    "지랄한다."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으셨다. 그 날 나만 보기 아까운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을 추슬러 20장 정도 업로드했다. 


    "할매, 할매~."

퇴근하자마자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는 방에서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 채널을 틀어놓으시고 무료하게 누워계셨다.

    "할매, 인제 모델된데이."

    "뭔 소리고?"

며칠 전 올린 사진이 인터넷에 화재가 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그 덕에 DM으로 유명한 모델 에이전시로부터 할머니를 시니어 모델로 고용하고 싶다고 한 번 뵙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그 외에도 작고 큰 회사로부터 할머니에게 모델 제의를 해 왔다. 할머니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할매, 할매. 모델된다고. 꿈 이룰 수 있다고! [꿈은 이루어진다] 모르나!"

할머니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그 눈물의 의미가 뭔지는 모르나 아마 황당함과 회한이었으리라. 

    "할매, 싸인. 싸인부터 준비해라. 인제 엄앵란보다 유명한 스타가 될지도 모른다."

    "지랄한다."

우스갯소리를 하니 그제야 사진 속 그 젊은 여자처럼 환한 웃음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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