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비가 내리더니 그 다음날 붉게 물들어가는 가지마다 열게 불그스름한 꽃봉오리가 맺혔다. 현지는 그 모습을 보면 자신의 혈관에도 수혈이 공급되는 것 같다면서 살 것 같다고 말했다. 현지는 신기한 여자였다. 또래 여자 아이 같지 않고 할머니처럼 복사꽃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했다. 첫 월경을 할 때 팬티에 묻은 생리혈이 꼭 창호지에 복사꽃 빻아 물든 것처럼 예뻤다고 했다.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무조건 사랑스러운 딸 일 것 같단 예감이 든다고 했다. 그때부터 현지는 자신의 계절을 복숭아의 일생에 맞추며 살았다고 했다. 나뭇가지가 붉게 물드는 순간부터 그녀는 행복해졌다.
"오빠, 우리 시골길 드라이브 가자. 복사꽃 필 때 되지 않았어?"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래 주말에 한 번 가 보자."
계절은 벌써 4월 중순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은 찰나와 같아서 지금을 담지 않으면 순간은 영원히 기억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미러리스 카메라 하나 챙겨 놓았다. 주말에 현지와 시골로 여행을 다녀올 생각에 덩달아 한석도 기분이 좋아졌다.
"진짜 예쁘지 않아?"
"예쁘지, 자기처럼, 자기도 복숭아 닮았잖아."
"진짜? 나 복숭아 닮았어? 내가 그렇게 탐스럽고 상큼하고 청량해 보여?"
"응, 말해 뭐해.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한 껏 입꼬리가 올라 간 현지의 모습이 참 예뻤다. 현지와도 벌써 2번째 함께 하는 봄이다. 꽃 같은 스물여섯에 만나 어느새 현지는 스물여덟이 되었다. 여전히 솜털을 간직한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토실토실한 아기 궁둥이 같은 두 뺨이 볼그스레 물들며 재잘재잘 말하는 현지의 입이 유쾌해 보였다. 그런 현지가 한석은 마냥 좋았다.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게 몽글몽글한 꿈을 꾸는 것처럼 좋았다.
"세상이 온통 복숭아 빛깔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맨날 솜사탕 같이 달콤하고 기분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거든."
"맨날 좋은 일 투성이면 그것이 좋다는 걸 못 느끼지 않을까?"
"몰라,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 봤는데. 왠지 오늘이 좋으면 내일도 좋고, 그 다음 날도 좋고 그럴 것 같아."
"자기가 좋으면 나도 좋지. 매일 좋은데 뭐가 더 중요하겠어."
들떠 있는 현지의 목소리가 한석의 마음까지 전해졌다. 차에서 내려 복사꽃을 가까이에 보고 싶었으나 현지는 농부의 밭에는 함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면서 한적한 도로가에 서서 복숭아 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에 조금 욕심내어 들어가고 싶었다. 꽃을 배경으로 찍으면 더 좋은 사진을 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지는 절대 반대했다.
"봐봐. 어떻게 나왔어?"
"이쁘게 나왔지. 근데 멀어서 잘 안 보여."
"우와, 예쁘다. 됐어. 이 정도면."
"다른 데로 옮겨서 또 찍어볼까?"
"아니야. 이 정도도 충분해. 괜찮은데."
자신의 몫에 적당히 만족할 줄 아는 현지의 모습에 한석은 왠지 부끄러워졌다. 돌아오는 길에 제철 두릅이 맛있다는 한정식 집에 들러 두릅 튀김과 두릅 숙회를 맛있게 먹고 돌아왔다.
복사꽃이 지고 열매가 맺혔다. 시간은 복숭아가 어느새 탐스럽게 익어가는 곳에 와 있었다. 현지와 한석은 지난 봄보다 더 깊은 사이가 되어 있었다.
"결혼식은 가을에 하는 게 어때?"
"난 봄에 하고 싶은데, 난 소규모로 예식장 말고, 복숭아 농원 빌려서 하면 좋겠다."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할까? 꽃 필 때쯤 되면 농부들도 한창 바쁠 때고."
"그렇겠지? 그럼 안 되겠지?"
"아는 농부도 없고, 출장 뷔페 부른다고 해도, 또 날씨도 어떨지도 모르고, 현실적으로 좀 그렇다."
"음... 현실적으로 그렇겠지."
현지는 한석의 그 현실적인 말들에 기분이 조금 상했다. 방법을 서로 찾아볼 법도 한데 한석은 어렵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한석과는 맞춰지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걸 느꼈다. 결혼 날짜부터 장소, 하객의 규모 등 맞춰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것도 속이 상했지만 그런 사소한 것까지 합이 잘 이뤄지지 않는데 짜증이 났다. 먼저 결혼한 친구들은 어떻게든 정해놓고 나면 싫든 좋든 시간이 지나면 다 하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살다 보니 기억도 안 난다고 했다. 그날은 그저 둘한테 좋은 날이기보다는 하객들 위주의 엄청 피곤한 날이라고 했다.
결혼은 한석의 말처럼 10월에 하기로 했다. 지금이 6월이니 준비할 시간이 무척 촉박했다. 신혼집부터 예식장 섭외, 웨딩촬영, 스냅 촬영, 혼수준비 등 등. 주말마다 시간을 내어 만나도 언제 끝이 날지 몰랐다. 한석은 그냥 대충 하면 된다고 준비하다 못하면 그냥 살면서 하면 된다고 했다. 현지는 그런 한석이 남처럼 느껴졌다.
"결혼은 나 혼자 하는 거야?"
"같이 준비하고 있는데 또 왜 그러는 건데."
날카로운 현지의 반응에 한석도 예민하게 받아쳤다.
"예식장도 예약했고, 웨딩 날짜도 잡아 놨잖아. 도대체 뭐가 불만인데 만나면 매일 이래?"
"왜 화부터 내? 뭐가 문제인지 몰라서 묻는 거야?"
"이제부터 차근히 하면 되잖아. 도대체 얼마나 더 너한테 맞춰줘야 하니?"
평소 일정한 톤을 유지했던 한석의 말이 한층 높아져 있었다. 현지는 문제가 뭔지도 모르고 자신이 기분을 헤아리지 못하는 한석이 못 미더웠다. 앞으로 남은 결혼 준비와 함께 살아갈 날들이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럼 이제부터 오빠가 다 해. 막말로 날짜는 자기 부모님이 정해줬다 쳐. 그 담부터 식장 예약하는 거 스드메 예약하는 거 그거 다 내가 했잖아. 그동안 내가 결정하고 오빠한테 컨펌받고. 이게 뭐하는 짓이야. 결혼은 나 혼자 하냐고. 같이 알아보고 결정하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신혼집은 언제 알아보냐고. 이러다 또 어영부영 한 두 달 흐르고. 식만 올리고 지금처럼 각자 집에서 살 거야?"
"하~."
한석이 깊은 한 숨을 내 쉬자 현지는 그 자리에서 경멸의 눈빛을 보내고 일어났다.
다툼이 일어나고 나서 결혼식 준비가 모두 멈췄다. 한석은 현지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사 가지고 집을 찾아갔을 때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현지는 더 이상 한석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결혼을 먼저한 친구들의 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결혼식 하나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한석이 싫어졌다. 서로를 믿고 인생을 살아가기엔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날 밤, 현지는 꿈속에서 자신보다 몇 배는 큰 복숭아 하나를 보았다. 박물관 같은 곳에 10m 정도의 큰 복숭아 하나가 전시되어 있었다. 검은 배경에 핀 조명 하나를 온전히 받고 있는 단순한 곡선의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 복숭아가 엄청 탐스러워 보이고 고귀해 보였다. 만져보고 싶은 맘에 손을 뻗쳤다. 있는 힘껏 손을 뻗었지만 닿을락 말락 한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갖고 싶은 데 가질 수 없는 그 힘에 못 이겨 현지는 눈물을 흘리며 깼다. 가장 자리가 밝은 핑크빛 아래로 짙은 검붉은 빛이 하얀 침대보를 물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