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여행그램 016. From Spain, Sevila
한장여행그램 016. 첫사랑은 봄과 함께 시작되었다.
봄은 첫사랑과 꼭 닮았다.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
선분홍 꽃을 틔워내듯이
그의 수줍은 손이 내 볼에 닿아
발그레한 꽃을 피운다.
첫사랑은 그렇게 봄과 함께 시작되었다.
벚꽃 보러 갈래?
도서관에서 전공서적과 씨름하고 있던 내게 캔커피가 말했다. 아니, 캔커피에 붙은 포스티잇이 벚꽃 데이트를 신청했다고 해야 하나. 능글맞은 속마음을 대신 전달한 불쌍한 캔커피와 포스트잇의 주인은 바로 동기 B군이었다.
큰 키와 넓은 어깨와는 달리 성격은 수더분하고 조용했다. 나서는 일이 없고 말하는 것보다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듣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저 큰 키는 분명 쑥스러움을 먹고 자랐을 거야,라고 생각할 만큼 숙맥인 녀석이 갑자기 벚꽃을 보러 가자고 말했으니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요즘 누가 그런 말로 꼬시니?"
나는 숙맥의 용기의 한도가 문득 궁금해졌다. 얄밉게 쏘아붙인 내 말에 B군은 의외로 받아쳤다.
"그래서, 안 넘어올 거야?"
하, 나참! 숙맥이 아침부터 뭐 잘못 먹기라도 한 걸까. 나는 당혹감에 아무 말도 못 하였다. 나의 침묵은 긍정도 아니었지만 더욱이 부정은 더 아니었다. 나의 침묵을 해석하자면 '지금 내가 안 넘어간다고 하면 나중에 넘어가는 내 꼴이 우습잖아. 어 그러니깐 내 말은 넘어갈거긴 한데 지금은 아니라는거야.'였다.
B군이 웃었다. 공부 잘해, 또 연락할게. 그때 벚꽃 보러 가자. 말하고 연애 밀당 패자를 남기고 유유히 도서관을 떠났다. 얼굴에 열이 씨익 하고 올랐다. 숙맥한테 졌다는 것보다 쿨하게 사라지는 저 녀석의 뒷모습에 설렜다는 사실이 나를 더 당황케 했다.
B군에게 연락이 왔고 우린 꽃피는 첫 주말에 만났다. 학교에서 몰랐는데 밖에서 보니 그의 훤칠한 키와 너른 어깨가 좀 괜찮아 보였다. 순간 B군이 내 남자친구여도 나쁘지 않겠어, 라는 생각이 1초간 내 전두엽에 띡! 하고 나타났다고 사라졌다. 이 사실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괜히 자존심 세우는 척 투정을 부렸다.
"너 혹시 이중인격자니?"
"응?"
"아니, 학교에서는 착한 척, 순진한 척 다하더니 이렇게 대뜸 작업을 걸지 않나. 나 진짜 놀랬다니깐. 아마 우리가 이렇게 데이트하고 있는 거 알면 과 전체가 뒤집어질 걸? 그러니 네가 이중인격자라고 생각이 들 수밖에. 안 그래?"
"아, 우리 데이트 중이구나."
20살 봄에 알았다. 첫사랑이 시작되었음을. 나는 이미 그의 '데이트' 한마디에 벚꽃보다 더 불그스름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고장 난 장난감처럼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의 시선 안에 머물려 애쓰고 있었다. 시작은 그 아이가 먼저 해도 사랑에 빠지는 건 내가 먼저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린 해가 지도록 벚꽃길을 걸었다. 우린 학교에서와 다르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평소보다 더 많이 웃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아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줄 몰랐는데, 알고 보니 '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말하지 않은 것뿐이야'고 했다. 또 수더분하고 조용한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것 역시 잘못된 추측이었다. 혹시나 다른 여자들과 친하게 지내면 네가 오해할까 싶었다고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워했다. 괜스레 나도 같이 부끄러워졌다.
벚꽃이 바람에 흩날렸다. 벚꽃이 내 눈을 스쳐 시야가 잠시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바람이 그치고도 그를 바라보는 내 눈빛은 여전히 핑크빛이었다. 썸남썸녀가 벚꽃을 보러 가는 이유가, 이건가 싶었다.
그의 손이 내 볼을, 내 코를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입학했을 때부터 네가 좋았어. 처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벚꽃이 필 때까지 기다렸어."
"왜?"
"아는 형이 그러더라. 벚꽃 보러 가자고 꼬시면 된다고."
"그런 말에 누가 넘어가냐 했더니 바로 나네."
B군은 '아는 형도 너랑 똑같은 말을 했다'면서 웃었다. 그렇게 티 나고 대놓고 꼬시는 말에 넘어오는 여자가 있냐며 놀렸단다. 그 아이와 나는 벚꽃이 흩날리는 이 곳에 서서 한참을 웃었다.
"그런데 내가 넘어올 줄 어떻게 알았어?"
"말은 그렇게 해도 네 볼이 발그레했거든."
20살의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네가 주는 설렘에 볼이 먼저 빨개지듯이. 봄이 오는 걸 꽃들이 먼저 알려주듯이. 네가 좋다는 감정을 숨길 수 없어 고스란히 털어놓고 마는 그런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첫사랑이 언제까지 봄날 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너와 함께 있어서 좋다. 발그레해진 내 볼이, 긴장했는지 땀이 나는 네 손이 우리가 함께라서 좋다는 걸 말해준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좋다.
한 장의 사진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 여행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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