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즈번 꽃집 이야기와 패키징의 미학
아직 어른이라고 말하긴 좀 어색하지만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모든 것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게 된다.
내 것이 아닌 것들을 억지로 욕심부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할까.
'인연이면 애쓰지 않아도 다 편안하게 풀리겠지' '나를 너무 힘들게 하는 건 인연이 아니다' 이런 말들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고픈 합리화의 과정인지도 모르지만, 애써보고 아등바등 대서 겨우 겨우 내 인연으로 만들었는데 그럴수록 나를 갉아먹게 되었던 아픈 기억이 많았던 탓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장 좋아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왜 소중한 것들엔 늘 힘이 더 들어가게 되는 걸까? 잘해보려 애쓰면 애쓸수록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 누구나 한 번씩은 겪어봤을 것 같다. 능숙하다고 해서 늘 진심인 건 아니고, 서툴 다해서 꼭 진심이 아닌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 얼마나 노력해야 하며 어디서부턴 놓아야 하는 건지 좋은 가이드북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어렵고도 쉬운 관계의 미학이 꽃을 닮은 것 같아서 나는 꽃과 꽃집을 좋아한다.
꽃이 피고 지는 데 있어 기본적으로 정해진 시기는 있지만 어떤 사람이 데려가느냐에 따라 얼마나 관심을 주고 어떻게 다뤄주느냐에 따라 더 빨리 시들기도, 더 오래 피어있기도 하기 때문. 그게 관계랑 많이 닮은 것 같다.
가끔 새로 남자 친구가 생기거나 결혼을 한 친구들 중에 얼굴이 굉장히 생기 있어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친구들이 있다. 반대의 케이스도.
그런 걸 보면 꽃도 사람도 누구에게 가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참 달라진 인생을 살아간다는 생각도 든다.
가장 중요한 건 나 또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생기 있게, 활력 있게,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느냐의 문제겠지. 그러고 싶은데.
울월스(마트)에 가는 길에 시티에 있는 꽃집을 찬찬히 구경했는데 꽃 자체도 예쁘지만 공간 구성과 패키징을 참 잘해놨다. 이런 것도 가게 주인의 애정이고 사랑이다. 단순히 매출을 높이고 싶은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업을 사람 하는 사람의 정성과 센스들. 한창 일러스트와 패키지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때라 그런지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비용과 투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보석보다 더한 사치품이 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보석은 나중에 되팔기라도 가능하지만 꽃은 한철이니까. 시드니까. 하지만 시들 것을 알면서도 뭔가를 살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거다.
여러모로 꽃은 연인 관계를 닮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울월스에 가서 식료품을 산다. 패키징과 라인업이 잘 되어있는 마트 코너를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호주 마트에서 보는 샐러드 코너는 Butter lettuce, Leafy Mix, Baby spinach, Baby leaf rocket, Salad kit 등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 항상 살 때마다 그 앞에서 최소 10분은 서성거리면서 뭘 살지 고민하게 된다. 그야말로 행복한 고민.
샐러드뿐만 아니라 허브 종류도 화분 버전, 가공 버전 등으로 다양하다.
요리는 재료 싸움이라는데 내가 요리를 좀 하는 사람이었다면 마트 올 때마다 매일 요리하고픈 의욕이 200% 충전될 것 같다.
식품 코너를 겨우 겨우 벗어나서 다른 통로로 들어와서 반가운 퀵이지를 발견했다. 시드니에서 있을 때 퀵이지 (Quick-eze) 덕을 많이 봤다. 츄잉 젤리 형태의 소화제라고 보면 되는데 배가 아프거나 위장이 콕콕 아파올 때
하나 꺼내서 먹으면 금방 통증이 사라진다. 나는 꼭 맛 별로 사다 두고 항상 가방에 휴대하고 다닌다.
Nando's에서 맛볼 수 있는 페리페리 소스도 이렇게 마트에서 살 수 있다. 타바스코 소스처럼 사다 두고 찍어먹으면 모든 고기류의 음식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맛.
호주 하면 팀탐이다 보니 과자 코너에 온갖 종류의 팀탐 버전과 맛들이 즐비해 있다. 자주 세일하니까 정가에 사지 말고 할인할 때 조금씩 쟁여두는 게 좋다.
나는 늘 미니멀리스트를 꿈꾸지만 마음 한 구석엔 쟁여두는 것의 기쁨 코너가 있다.
손잡이가 두툼한 예쁜 장바구니를 발견했다. 폭도 넓고, 딱딱한 코튼으로 되어있어서 가볍고 쨍쨍하다. 별 거 아닌 일상적인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지만 원래 이런 아이템 하나로 인해서 장 보고픈 마음이 더 드는 거다.
나의 패키지 디자인 아카이브에 또 하나 저장해둔다. 그리고 2개나 샀다.
처음엔 이 물도 Sparkling Water (탄산수)라고 쓰여있는 걸 잘못 보고 사서 부엌에서 열었다가 물바다로 만들었던 기억도 있다.
티백을 파는 코너에도 패키지가 예쁜 제품들이 많아서 효능별로, 색깔별로, 티 잎 별로 구경하고 살펴본다.
Sleep aid (수면 보조) 기능이 있다고 쓰여있는 제품들을 보면 늘 눈길이 한 번씩 더 간다.
마트 가면 시리얼 코너에서 한참을 못 움직이고 서있기도 한다. 미니 버전으로 나온다면 하나씩 사서 다 먹어보고 싶은데 너무너무 아쉽다.
우유를 마시지 않는 나는 유제품도 어느 순간 이후 멀리하게 되었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요거트 코너 앞에서도 오래 서성이곤 한다. 여긴 무슨 맛이 있는지, 무슨 브랜드가 가장 인기 있는지, 가격은 얼마나 차이 나는지 등등을 꼼꼼히 살펴본다. 쉽게 못 보는 종류의 맛을 발견하면 꼭 하나씩 사놓게 되기도 한다.
꽃가게와 마트를 실컷 구경하고 돌아오면서 일단 내용물이 가장 중요하지만 거기 담긴 철학, 그걸 담는 패키징, 전체적인 브랜딩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느끼는 좋은 날.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