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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Nov 21. 2023

신발 30켤레를 빨았다

우리 집에는 지네 네 마리가 삽니다

어느 해 2월 소개팅으로 남자를 만났다. 3월에 남자와 사귀기로 한 여자는 3월 14일, 화이트데이 선물로 운동화를 받았다. 신발을 선물하면 도망간다는데 무려 첫 선물로 운동화라니. 건네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이거 한정판이야.


그리고 그 남자와 9년째 살고 있다.



남편은 운동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우리 집 현관 신발장은 꽤나 큰 편인데 남편이 더 넓은 쪽을 혼자 쓰고 딸(이제는 딸들)과 내가 더 좁은 쪽을 사용한다. 그런데도 남편의 신발은 현관에 4~5켤레 정도 나와있다. 그나마 두 번의 이사를 거치며 처분해서 이 정도인 것은 안 비밀이다. 그런 남편은 어제도 전화해서 새로운 러닝화를 살까 말까 묻는다. 필요하면 사라는 내 말에 이렇게 답한다.


내가 사는 것 중에 꼭 필요한 건 없어


오 마이 갓. 나 같은 맥시멀리스트는 미니멀인 줄로 착각하게 하는 소비왕 남편의 말에 와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사정이 이러하니 1년 반 연애를 하고 1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나의 신발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늘었다. 구두 두어 켤레, 샌들 두어 켤레, 그리고 운동화 두어 켤레가 전부였던 나인데 신발의 종류, 모양, 브랜드 모두 다양해졌다. 발이 쑥쑥 크는 큰 딸의 신발은 더 무섭게 늘어났다. 새 운동화를 사기 좋게 아이의 발은 쑥쑥 커버리지 않는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이의 작아진 신발은 일단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처박아놓고 잊고 지냈다. 그러다 둘째가 태어났다. 아직 서지도 못하는 둘째에게 10켤레가 넘는 신발이 들어왔다. 115~125 사이의 신발이 단화, 샌들, 구두, 부츠, 걸음마신발까지 다양하게 들어왔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신발장의 신발을 다 쏟아냈다. 신발장을 싹 닦고 꼭 필요하긴 하지만 자주 신지는 않는 구두를 제일 윗 칸으로 보냈다. 계절을 타거나 오래 걸을 때 신기에 적합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덜 신는 신발부터 집어 올려 차례차례 채워 넣고 내려왔다. 아이가 신발을 넣고 꺼내기 좋을 높이에 아이의 신발도 정리해두고 나니 현관엔 신지 않을 신발, 작아진 신발 등이 버무려져 있었다.


좋아, 다 무찔러 버리겠다.



충동적으로 시작하고 마무리가 약한 나는 오늘 안에 마무리 짓겠다고 소리 내어 말했다. 안 그러면 며칠이고 신발이 방치되며 베란다까지 어지르게 될 게 뻔하다. 얼른 베란다 싱크볼에 나름 종류별로 나눈 신발을 두세 번에 걸쳐 담그고 비비고 문지르고 헹구어댔다. 도대체 몇 켤레나 될까 싶어 늘어놓고 말릴 겸 사진을 찍고 세어봤다. 30켤레였다. 그동안 몸이 찌뿌둥한 게 이것들이 날 밟고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해진 건 신발들과 신발장인데 이상하게 내가 더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들 아이들의 발 사이즈를 물어 물려줄 만한 것들을 솎아내고 물려줄 사람이 없거나 둘째가 신는 게 더 빠를 것 같은 신발들은 하나하나 제습제를 넣어 봉하고 사이즈를 표기해 둔 뒤 튼튼한 쇼핑백에 담아 신발장에 넣었다. 신발을 정리한 김에 우산과 현관에 두고 쓰는 마스크, 실내화도 정리했다. 아, 가지런하고 예뻐라.





발은 두 개뿐인데 신발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소비를 위한 소비를 한 적은 없는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소비를 즐겨하지 않음에도 물욕은 있어 남편이 사준다는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던 나를 떠올렸다. 세상에 운동화는 나이키, 아디다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비싸고 귀한(한정판) 운동화가 많다는 것을 알며 눈독 들였던 나를 떠올렸다. 사느라 돈 쓰고 신을 땐 신줏단지 모시듯 편히 못쓰고 처분하려니 또 에너지를 쓰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편의 선물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쌓인 게 저만큼이다. 신다 보니 이 옷엔 이 신발, 저 옷엔 저 신발 따지게 되는 나는 아직 멀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젠 발이 자라지 않으니 떨어질 때까지 구입하지 않기로 아무도 모르게 마음먹는다.


비단 신발에만 해당되는 건 아닐 테니, 뭐든 쉬이 욕심내어 들여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게 없어야겠다고 꼭꼭 씹어 삼킨다. 기분에 취해 즉흥적으로 시작만 해대는 것도 같은 맥락인 듯하여 반성한다.






언제고 나를 삼킬 듯이 내 신발이 아니면 아이들의 신발이, 그리고 남편의 신발이 늘겠지만 남편은 남편 알아서 하라고 하고 나만은 두 가지를 지키겠다. 첫째의 발에 작아진 신발은 바로 빨아 보관하거나 물려줄 것이다. 둘째의 발에 작아진 신발은 바로 물려주거나 버릴 것이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신발장을 유지하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공간도 잘 다듬어 유지하자고, 그리고 조금 더 덜어내 보자고 채근해 본다.


좌) 정리 전, 우) 정리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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