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니지만
며칠이고 고꾸라져 있는 날들이 이어졌다. 쓰고 싶은 말들은 많았지만 속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올 초에 계획했던 공황장애 이야기를 세상에 글로 내뱉으면서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했는데 쓸 때마다 울컥울컥 올라와서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졌다. 컨디션이 나빠지면 두 아이를 육아하는 것에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별 것 안 하고 보낸 날이면 하루종일 뭐 했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곤 했다. 자꾸 스스로를 몰아세우게 되었다.
날이면 날마다 교권 침해에 관한 뉴스가 쏟아지고 상처에는 소금을 뿌린 듯 통증이 올라와 자꾸 쳐졌다. 남편은 나를 가만 보더니 갑작스럽게 화를 냈다.
이제 좀 괜찮아졌는데 당신 위험해 보여. 어떻게 괜찮아졌는데!
걱정되어하는 말인 것을 알지만 마음속에서 삐죽. 그래도 난 살아있지 않는가. 내가 힘든 건,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오랜만에 찾아간 병원에서 교수님으로부터 약을 안 먹으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모유수유도 중요하지만 위험한 생각이 들지 않게 사회적 이슈에서 거리를 두고 이입하는 것을 멈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정신 차리자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힘을 보태되 내가 나를 잃어서는 안 되겠구나. 정신 차리자.
그래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허우적거리는 사이 더웠던 여름이 어느덧 저만치 멀어지고 완연한 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하늘이 눈 부시도록 맑고 높았다. 마음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시월이었다.
첫째를 학교에 보내고 환기하려 창문을 열면 찬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진다. 원래 입던 반팔, 반바지 러닝을 입고 모자끈을 조여 맨다. 가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낸다고 하니 자외선이 무서운 30대는 선크림을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큼 짜 바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물론 선글라스도 당연히 착용한다. 그리고 커피를 한 잔 내려 얼음과 함께 텀블러에 담아 유모차에 끼운다. 벌써 8개월이지만 아직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둘째는 내 러닝메이트다. 첫째가 아침 먹을 때 이 녀석, 아니 이 분께서도 이유식을 한 그릇 뚝딱 잡숴주시니 치발기를 챙겨 서둘러 출발하면 기분이 좋으실 것이며, 그렇다면 우시지 않고 유모차에 탑승해 주실 것이며, 그래야 달리는 중에 잘 놀다 스르르 잠에 들어주실 것이다.
그렇게 다시 달린다. 혼자 달릴 때는 흙길이 있는 공원을 달렸지만 유모차를 밀며 달릴 때는 남편의 조언대로 조금 더 거리가 있지만 포장이 잘 되어 있어 유모차를 밀기에 용이한 공원을 달린다. 처음 달리는 공원의 코스를 알 길이 없어 언제 끝나나 하는 생각이 시작하자마자 들었지만 달리다 보니 낯선 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고 또 가도 새로운 장면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사람들은 흘깃흘깃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 은근히 즐기면서 달린다. 유모차 안의 둘째는 선글라스 알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말똥말똥 웃다가 금방 잠에 든다. 그러면 더 속도를 낸다. 얘가 자는 동안 두 바퀴를 돌고 집까지 가서 씻기까지 해야 하므로.
공원을 두 바퀴 돌고 나면 숨을 몰아쉬며 횡단보도까지 달려 나가 무더위쉼터 아래 선다. 오늘도 잘 뛰었다 스스로 다독이며 인증샷을 찍어 남편에게 전송한다. 보행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뀔 때까지 심호흡하며 남편이 보내온 엄지 척 이모티콘을 확인한다. 그때 커피를 마신다.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집에 돌아가할 일을 생각한다. 운동했으니 영어책도 읽고 스피킹도 하고 무엇보다 글을 써야지.
그렇게 다시 글을 쓴다. 이유식을 만들어가며 집을 정리해 가며 글감을 생각하고 기록한다. 아직 상처를 뒤엎는 게 힘이 든다면 일단 쓰고 싶은 것부터라도 쓰자 생각한다. 그러다 글을 쓰려고 하는데 집이 엉망진창이라 흐린 눈을 할 수가 없어 집부터 정리하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헤집어가며 정리를 하다 보니, 젠장 도저히 글 쓸 시간이 나질 않는다.
할 수 없이 집을 정리하는 글을 썼더니 기특한 밥통, 쓰레기통 시리즈가 에디터픽이 되기도 하고 메인에 뜨기도 하고 조회수와 구독자가 오른다.
이때다 싶기도 하고 한번 쓰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어 아이들을 재우고 새벽 세시까지 몰아치듯 글을 뱉어낸다. 정리를 테마로 제목을 뽑아보니 15편 정도 될 것 같아 브런치북으로 엮어내면 딱이다 싶은데 시작한 날이 마감일 3일 전이다. 마음은 급한데 남편이 집을 비워 2박 3일 독박육아다.
괜찮다. 올해 브런치북을 못 내면 내년에 1등으로 응모하면 된다 싶어 첫째가 읽어달라는 책을 무한으로 읽어준다.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자 싶어 더 실감 나게 호랑이 흉내를 내며 흥미롭게 책을 읽어준다. 졸려하며 방에 들어가는 첫째의 뒤통수에 대고 포기하려던 마음을 살짝 접어 넣고 이때다 싶어 어떻게든 해보려고 엄마, 3분 뒤에 갈게. 뭘 좀 내야 돼서. 하며 브런치를 뒤져본다. 과거의 내가 상처를 보듬던 기록이 나를 구한다. 다시 쓴 보람이 있다. 아직 공황장애가 생긴 뒤 상황파악을 어떻게 했고, 어떠한 괴롭힘을 얼마나 당했고, 그것에 맞서 싸우기 위해 어떻게 대응했고, 그 결과는 어떠한지 쓰려고 했으나 그건 또 쓰면 된다. 지금까지 쓴 것부터 일단 내보자 싶다. 잘하려고 하는 것보다 일단 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앞으로도 아마 또 고꾸라지고 꺾이고 하겠지만 스스로 다그치기보다 응원하고 다독이면서 또 달리고 또 글을 쓸 거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니지만 달리기와 글쓰기를 계속할 거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니까 덜 부담 갖고 더 꾸준히 할 거다. 공황은 있지만 잘 살고 싶은 나는 할 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