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을 떠나 발리로 가는 길목에서
<서른 여행자>는 2019년 6월 시작한 윤혜와 니콜라스의 동남아시아 여행 이야기입니다. 필리핀, 발리, 태국, 캄보디아를 거쳐 8월 말 한국에 들어왔지요. 거창하게 일주 타이틀을 달고 시작했지만 돈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몇몇 나라를 솎고 일정도 대폭 줄여 버렸습니다. (맥주만 덜 마셨어도...)
연재는 여행을 결심한 시드니에서의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1편 필리핀, 2편 발리, 3편 태국 남부 4편 태국 북부로 나누고, 여행의 목표였던 앙코르와트에서 에필로그 마무리하려 합니다. 한 달에 걸친 필리핀 편을 끝낸 지금, 잠시 쉬어갈 겸 우리의 여행 스타일에 대해 몇 자 씁니다.
우리의 여행은 항상 ‘현지인이라면’이라는 전제로부터 시작합니다. 현지인들은 어디서 놀까? 어떤 바다를 갈까? 어떤 산을 좋아하고, 어떻게 산을 오를까? 어디서 무슨 음식을 먹고 어디서 공부하고 어디서 여가를 즐길까?
그러다 보면 ‘왜’가 생깁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다 보면요. 왜 필리핀 여대생들은 긴바지를 입을까? 왜 마닐라엔 여행자 거리가 없을까? 왜 태국 불교 공휴일엔 술을 팔지 않을까? 부터, 자연과 환경을 보며 필리핀 바닷물은 왜 따뜻할까? 왜 인도네시아의 벌들은 뚱뚱하고 클까? 왜 바투르 산은 겹봉우리가 된 걸까? 왜 팔라완 섬엔 아스팔트 도로를 깔지 않았을까? 왜 푸켓 산 깊은 곳에 학교를 지었을까?
누군가에겐 굉장히 사소할지도, 그래서 조금은 귀찮을지도 모르는 작은 질문들로부터,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그 나라를 이해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합니다. 남의 힘을 빌리기 시작하면 우리만의 ‘왜’가 사라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발품 팔아 투어를 직접 꾸리고 모터바이크를 빌려 궂은 날씨 아랑곳 않고 하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해 버립니다. 이 제멋대로 여행은 능동적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수동적이었던 지난날의 저의 여행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여행 첫날, 마닐라에서 한 말이 아마 긴 여정의 요약이 될 것입니다. 우린 관광(觀光)이 아니라 여행(旅行)을 왔다고.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보는 것(觀)과 행하는 것(行)은 다릅니다. 우리는 그저 보고 떠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그네처럼 이리저리 다니는 겁니다. 볼 것이 없어도 다닙니다. 볼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특별한 이야기들이 생깁니다.
일을 마치고 가판대에서 싸구려 위스키를 마시는 아저씨들과 어울려 이야기하다 보면, 섬의 숨겨진 아름다운 장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터바이크를 빌릴 때, 사장님들에게 “아저씨는 주로 어디 가서 점심 드세요?” 물으면 진짜 싸고 현지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택시 기사님들에게 “기사 식당 어디가 좋아요?” 묻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요. 슈퍼에서 맥주 사기 전에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가 뭐예요?” 물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사장님은 뭘 ‘선호’하세요?” 덧붙이는 것, 굉장히 사소해 보이는 이런 질문들이 우리를 그들의 삶으로 기꺼이 들어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사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귀찮고 불편한 일을 잘 참고,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데서나 잘 자는 체질 덕에 가능했습니다. ‘모험’과 ‘불편’은 항상 양립하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니콜라스도 비 왕창 맞으며, 모기와 사투하며, 덜덜 돌아가는 끔찍한 에어컨 소음 속에서도, 또 익숙지 않은 ‘밥’과 ‘매운 것’ 틈바구니에서도 잘 살아남았습니다. 아마 ‘모험’이 주는 즐거움이 순간순간의 ‘불편’을 이긴 것 같습니다.
덧붙여 우린 상대방을 위해 불편함을 쉬이 참을 수 있었고, 짜증 나는 일들마저 대화로 풀 수 있었기 때문에-사실 우린 좀 낙천적이고 웃긴 사람들이라 유머로 많이 풀었습니다-, 결국 서로 사랑하고 신뢰했기 때문에 미친 듯한 여름 더위의 우여곡절 동남아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진지한 인생 성찰하지 않기로 한 여행에서 인생을 돌아보고야 말았습니다. 젠장.
앞으로의 에피소드들도 지금처럼 여행 이야기를 빙자한 사랑과 인생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결혼도 안 한 처자의 미래를 걱정하는 엄마는 웬만하면 여행 이야기 위주로 올리라셨는데... 아마 못 지킬 것 같아... 미안해!
내일부터는 발리 에피소드를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우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짧은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