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워크캠프에 참여할 무렵, 김한민 작가의 『그림 여행을 권함』 책을 읽고 상당히 고무된 상태였다. 그래서 언젠가 나도 그림 여행을 떠나보고 싶었고, 멕시코 여행에선 일부러 사진을 찍지 않는 그림 여행을 하기로 했다. 절반은 성공이고, 절반은 실패다.
빗 속 바비큐 때 멋진 활약을 했던 프랑스 친구가 아시아에서 온 우리더러 이랬다. 아시아 애들은 전부 카메라를 들고 ‘오오!’ 하면서 사진 찍는 제스처가 똑같다고. 어느 나라든 옛날 관광객 이미지는 목에 큰 카메라를 걸고 다니는데 (지금은 휴대폰 카메라로 대신할 뿐), 그게 꼭 아시아인들만의 특징인가 싶기도 한데 빈도와 경향에서 아시아 출신들이 사진에 집착하는 게 유난이긴 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최근 유머 짤로도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있다.
외국에서 한국인이나 아시아인에게 사진 찍어 달라고 하면 배경과 사람이 적당한 비율로 나오게 SNS에 올리기 좋게 잘 찍어 주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이 사람이 있다’의 존재만 증명하는 이상한 비율의 사진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예전에 문화적 관점으로 분석한 글도 있었는데, 우린 배경 맥락에서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게 중요하고, 서구권은 자신의 존재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설명이었다.) 아무튼 사진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사진을 잘 찍는 사람들도 많은 건 사실이다.
아무튼 그림 여행을 하다 보면 사진 찍기 위해 현존을 놓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워크캠프 중간에 근처의 유명한 공동묘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가이드가 관광객을 내려놓고 ‘자, 여기가 어디입니다.’라고 하자 모두가 파블로프의 개처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마치 다시 들여다보지 않을 거지만 반사적으로 필기를 하는 모습처럼. 사실 돌아와서 다시 들여다보지 않을 정도로 나의 맥락에서 떨어진 관광지보다 오히려 내겐 멕시코 현지 마을을 찍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사진을 찍지 않고 그냥 들여다보기에 집중해 봤다.
확실히 일부러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으니, 현장의 색, 공기, 온도, 냄새 등에 더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절반의 실패라 한 것은, 내가 글, 그림으로 남기는 속도보다 잊어버리는 속도가 더 빠르니 그래도 기록 차원에서 약간의 사진은 남겨 두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대신 그림 여행을 해보니 좋았던 점이 있다. 사소하게는 일행과의 여행에서 온전한 각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워크캠프가 끝나고 멕시코 시티를 짧게 관광할 때,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를 같이 간 일행이 있었다. 일정이 맞아 함께 이동했는데, 어느 순간엔 자기만의 방식으로 여행하고 싶은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같이 간 일행이 먼저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말하는 게 좀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때 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된다고 했더니 무척 기뻐했다. 왜냐하면 억지로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고 양보해 주는 느낌이 아니라, 정말 편안하게 자신의 시간을 갖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란다. 내가 그림 여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차피 나만의 것을 하면서 기다렸을 것 같은데, 아주 미묘한 차원에서 그 일행은 불편함을 느꼈을 것 같다. 아무튼 난 그 시간에 피라미드의 돌들을 관찰하고 그리면서 일종의 그림 명상을 진행 중이었다.
사실 그림 여행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인데, 이 여행이 내겐 큰 계기가 되었다. 어릴 때 그림일기 쓰던 힘이 어느 순간 끊어졌다가, 점점 그 힘이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누구나 초등학생 때는 그날 겪었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확하게 잘 그리는 것은 고사하고) 나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힘도 잃어버린다. 앞서 바비큐 때 활약하고 사진 찍는 아시아인을 놀린 프랑스 친구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려주는 봉사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그림에 감탄을 하던 내게 그랬다.
“너도 원래 다 이렇게 그릴 수 있었어.
다만 오랫동안 안 그려서 잊어버렸을 뿐이지.”
사실 꾸준히 계속 그림 그리는 힘을 유지했다고 한들 그녀만큼 잘 그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도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힘이 끊어진 것은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그런지 그 여행 이후 의식적으로 이런 내면의 힘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창의성과 예술 분야에서 찾아보고 있다. 잊어버리기는 너무 쉽지만, 다시 그 힘을 회복하는 데는 정말 많은 의식적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씩 그 힘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