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랑디 3주 차 (2019.10.21 - 2019.10.25)
서당개가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어떤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도 그 분야에 오래 있으면 어느 정도 지식과 경험을 가질 수 있다"라는 속담이다. 비록 3년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제 풍월을 읊기 시작한다. 나는 안 들리던 불어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고, 입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추측과 눈치와 한국에서의 경력이 낳은 값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나의 약간의 노력도 포함시킨다. 다양한 일을 하다 각자 목표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모인 그들도 이제는 일정 수준의 제품을 생산해 낸다. 눈동자의 색깔과 피부색은 다르지만 제과라는 목표 하나로 우리는 성장하는 단계에 있었다. 그리고 우린 서로 다른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다.
기존에 구사하던 내 불어는 여기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대화의 수단에 불과했다. 제과제빵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동사와 시제 변화 그리고 도구와 명칭은 나에게 위협적이다. 몰라도 아는 척해야 하고 아는 문장에 그것들이 들어가면 심지어 바보가 된다. 게다가 매일 엄청난 양의 정보가 쏟아진다. 1년 6개월 남짓 배운 불어의 그릇은 모든 정보를 받아내기에는 터무니없이 작다. 우리가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모르고 서로에게 적응하기 전까지는 더 그랬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
매일 같은 주방 온도, 매일 같은 생산자의 기분상태. 모든 것이 매일 같은 상황이라고 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모든 제품을 일정하게 만들고 진열하여 고객과 마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제품을 매일 일정하게 만들기 위해 셰프는 변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확인해야 한다. 제품의 문제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알아야 이후의 제품에 실수를 줄일 수 있다. 흔히들 그것을 경력이라고 하지만 실력이다. 경력과 실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24명을 담당하는 2명의 셰프는 이 곳은 모든 환경의 변화를 예측 가능하다. 나의 부족한 제과 실력과 부족한 불어 실력으로 낯선 공간에서 짧은 시간 안에 스스로 제품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여긴 프랑스다.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필요한 것을 취득하는 것이 어려운 점을 해결하는 지름길이자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배움에는 특별한 길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페랑디에 와서 만든 내 제품들에 만족하지 못한다. 처음 만들어 보는 제품들이 더 많다. 그래도 남들과 같다면 내가 제일 잘하고 싶다. 매일 셰프에게 만든 제품을 평가받는다. 그는 잘못된 부분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해주고 이해했는지를 반드시 물어본다. 문제가 있는 제품도 내가 만든 제품이지만 인정할 수 없어 몇 번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예쁘게 포장하고 사진을 남기는 그들 사이로 먼저 주방을 나왔다. 칭찬을 기대한 못난 욕심이었을까? 실수를 회피하고 싶었을까?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는 것들이 나에겐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실수를 직면할 필요를 느낀다. 실패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다.
대리석판 작업대 양 옆으로 12명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개인 도구 소독과 개인위생 그리고 그 날 만들어야 하는 모든 제품의 계량을 끝낸 상태다. 오전 8시가 되지 않았다. 속도가 빨라졌다. 몸이 익숙해지니 속도가 빨라진다. 갈수록 열정적이다. 서로를 격려하고 눈빛만 봐도 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다. 서로 단합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속도로 가장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온전하게 말이 통하지 않아도 주방에서 만큼은 우리는 완벽한 팀플레이를 보여준다. 서로 얼마나 할 말이 많은지 셰프에서 시끄럽다는 지적을 받는 것까지도.
내가 너에게 설명해줘도 되니?
엘로디라는 친구는 우리 반에서 제일 키가 작은 눈동자가 파란색인 프랑스인이다. 나이는 정확히 모르지만 나보다 몇 살 많은 것이 분명하다. 난 그녀가 주방에서 가만히 있는 것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보이지 않은 곳과 팀원들을 잘 신경 쓰는 꼼꼼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친구다. 그리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셰프의 시연 도중에 반드시 물어본다. 무엇보다 내가 그녀의 궂은일을 도와줄 때면 나에게 엄지를 올리며 해맑게 웃어준다. 그리고 다른 궂은일을 찾아 떠난다. 우리 팀의 엄마 같은 역할이다.
매일 만들 제품에 대해 셰프는 중요한 부분을 전달하고 시연을 해준다. 이때 중요한 부분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셰프의 시연을 봐도 내가 직접 만들었을 때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다. 불어는 사전을 찾아 해석하면 가끔 그것과 전혀 다르게 해석될 때가 있다. 내가 이해 안 되는 표정을 했는지 엘로디가 나에게 오더니 이해했는지 물어본다.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내가 너에게 설명해줘도 되니?"라고 한다. 그리고 웃으면서 최대한 쉽게 그림까지 그려주며 설명해준다. 엘로디가 나에게 먼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면 내 제품에 분명히 새로운 실수가 추가되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대를 위한 배려가 가득한 친절이다.
RITZ PARIS ( 리츠 파리 )
호텔 리츠 파리는 1898년 파리 1구 방돔 광장에 세워진 그 역사만 100년이 넘는 초호화 호텔이다. 파리의 국보급 건물로 리츠의 뜻은 "우아함의 마지막 표현"이라는 뜻이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호텔 중 하나로 손꼽히며 파리, 런던, 마드리드만 리츠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나머지 곳은 리츠칼튼이라는 이름의 체인을 가지고 있다. 각국의 왕가와 귀족, 부호,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예술가들의 거처가 되었고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코코샤넬이 30년이 넘게 이 곳에서 살다가 숨을 거뒀다. 프랑수와 페헤(francois perret)라는 세계적인 제과 셰프가 이 곳의 제과팀을 담당하고 있다. 그의 제품들은 클래식하면서도 현대적이며 깔끔한 리츠호텔에 어울리는 고풍스러운 디저트로 유명하다.
내년 1월이면 24명 전원은 4개월 동안 제과점에서 현장실습을 해야 한다. 학교 입학 전에 우연히 페랑디 전년도 한국인 졸업생을 알게 되고 현장실습을 미리 구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올해 8월 한 달 동안 3번의 면접을 통해 리츠호텔 현장 실습 합격 통보를 미리 받았다. 24명 중에 나를 포함한 5명 정도는 입학 전 미리 현장실습을 구했다. 학교에서 주는 서류를 현장 실습하게 되는 회사에 주면 회사가 적어야 할 서류의 빈 곳을 채워 나에게 돌려준다. 그것을 학교에 다시 제출하면 학교와 회사와 내가 서명을 해야 하는 서류를 3장 주게 된다. 그곳에 내 서명을 하고 회사의 서명을 받아 학교에 제출하게 되면 행정적인 현장실습 준비는 끝난 것이다. 입학 후 3주 동안 시간상의 문제로 양해를 구하고 메일과 전화로 이 모든 일을 끝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지 같은 시간 - 페랑디 편"이 끝나면 "가지 같은 시간 - 리츠 파리 편"으로 글을 이어 나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