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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산행들이 꿈만 같다.

by 안녕나무

지난달 11월 9일 백두대간 진부령을 걷는 것을 끝으로 2년간의 백두대간종주가 끝났다. 나는 10번의 보충산행을 다녀와 45구간을 결국 다 걸었고 완주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어느덧 한 달이 흘러 내일 종산식을 앞두고 있다. 산행이 없는 한 달을 보내면서 그동안 다녀온 산행들이 꿈이 아니었던가 싶었다. 한 없이 늘어져 지내며 산행이 너무 먼 일처럼 느껴지면 허벅지에 힘을 주고 만져봤다. 아직은 돌처럼 단단해지는 근육들이 만져지니 꿈은 아니었나 보다. 허벅지 근육마저 사라지고 나면 나에겐 무엇이 남을까.


무릎이 아파도 가고, 컨디션이 나빠도 가고, 긴 산행은 둘째를 맡기고 산에 갔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까지 갈 필요가 있어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내 몸 하나 끌고 가기도 힘겨워 길게 답하지 못했으나 속으로 '가고 싶으니까'라는 답을 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끝나봐야 알 수 있는 거 아닐까. 늘 그렇잖아, 그땐 잘 모르겠고 지나고 보면 다 보이고, 그냥 알아지더라고.


나는 왜 그렇게 계속 산에 갈 마음이 났을까. 나는 작년에 백두대간 첫 산행을 함께 하고 나서 내 인생에 '산 복'이 터지는 시기임을 직감했다. 아들을 데리고 산에 다니며 혼자 했던 모든 일들을 - 갈만한 산 알아보기, 운전, 어르고 달래기, 식당 알아보는 일 등등 - 한 명이 한 가지씩 맡아서 하는 걸 보고 '이거다!' 싶었다. 심지어 아들을 새벽에 깨워 버스를 태우기만 하면 친구들 따라 사라져 버려 산에 내려와서야 만날 수 있었다. 둘째 맡길 곳이 없어 산에 데려갔더니 자기 아이와 가지 말라며 나를 떨어뜨려주었다. 영상 보며 종일 뒹굴 토요일에 온 가족이 백두대간으로 모험을 오다니, 참 근사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온 기회를 백분 누렸다.


새벽에 산에 들어설 때, 숨이 깊이 쉬어진다. 봉우리를 두세 개 넘어가는 대간길은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지루해도 계속 걷다 보면 결국 끝에 도착했다. 오르막길도 끝이 있고, 내리막길도 끝이 있었다. 평지는 생각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산행이 거듭 될 뒤로 다음 산행이 기대됐다. 산행 전 날부터 설레기도 했다.


열 시간 동안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이들을 사이에 두고 공동체를 이루어 산행했다. 무전기로 앞 뒤 상황을 공유하고, 아이들 위치를 확인했다. 산에 온 아이들은 다 대단하게 여겨졌다. 핸드폰을 보며 걷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줘야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린이와 청소년은 어른보다 산을 잘 탔기 때문에 딱히 아이들에게 잔소리할 일이 없었다. 선두와 후미 사이에서 만났다가 헤어졌다 반복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모두가 체력 한계를 느끼는 길고 험한 산행에서 다른 사람의 가방을 들어주는 사람들을 볼 때는 인류애가 차올랐다. 함께 모여 앉아 간식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회복하는 시간만큼이나 혼자 걷게 되는 순간도 좋았다. 글 쓸 내용을 녹음하기도 하고, 혼자 말을 하며 걷기도 하는 시간은 나와 대화시간이었고, 내 안에 어떤 것들이 있나 들여다볼 수 시간이었다. 나와 만나는 이 시간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나는 주로 후미였고, 남편은 선두였다. 선두는 밤새 부지런한 거미들이 쳐 놓은 거미줄에 온몸으로 치워가며 나아갔다. 펄떡거리는 아이들을 자제시키며 길을 잃지 않게 산 길을 찾는 선두에는 박력 넘쳤다면 후미에는 낭만이 흘렀다. 힘든 사람을 기다려주고, 할 수 있다며 서로를 북돋았다. 산 아래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함께 가기', '늦는 사람에게 맞춰가기' 들이 후미에서 이루어졌다. 후미대장님의 가방은 요술가방이라 불렸는데 - 언 콜라, 브라우니, 앙버터빵, 호떡, 핫도그 등 - 이 끊임없이 나오다가 나중에는 국수까지 나왔다. 재촉 한번 하지 않고 '멈춰 쉬는 이들의 한 걸음' 뒤에서 가만히 기다려 주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다려준다'는게 어떤 건지 배울 수 있었다.


산에 안 빠지고 가겠다고 목표를 세웠지만 빠질 일이 계속 생겼다. 작은 아이가 열이 났고, 큰 아이가 독감이 걸렸다. 피치 못할 집안행사가 산행 날과 겹치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10번의 보충산행을 해야 했는데 여기서 또 다른 산행의 재미를 느꼈다. 걷는 속도가 달라 같이 갈 일이 없었던 이들과 보충산행을 같이 했다. 열 시간은 서로를 알기에 너무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 45회 산행이 다 끝나고 보니 알겠다. 지난 2년은 대단한 시간이었고, 대단한 도전이었다. 지리산에서 설악까지 720km를 걷는 일은 나 혼자였다면 못했을 일이다. 우선 나는 길을 잘 찾지 못해서 안된다. 사계절을 산 길을 걸으니 눈, 비, 해, 바람과 제대로 만났다. 나는 이제 날씨 미리 읽고 제대로 대비할 수 있다. 산에 사는 벌, 뱀, 새, 다람쥐, 멧돼지가 살고 있었다. 벌집을 밟으면 내 종아리를 공격해 왔다. 벌에 쏘인다는 건 가시를 손으로 꾹 눌러 찍는 것 같은 느낌이다. 깜짝 놀라게 따갑다. 이런저런 일이 생기지만 하나하나 극복해 가다 보면 어느새 끝나있다. 본산행과 보충산행을 연달아할 땐 몸무게 5kg가 급하게 빠졌었는데 산행이 반복되니 나중에는 기대한 만큼 빠지지도 않더라. 근육이 붙은 몸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아프면 다음 산행이 예정되어 있는 2주 안에 컨디션을 회복해야 하니 병원을 빨리빨리 다녔는데 이제 무얼 중심으로 건강을 챙겨갈까 싶다.


요즘 며칠 째 사람들과 종산식 준비를 하고 있다. 완주, 종주, 참가자들의 상장에 사진을 편집해 넣어주는데 지난 2년간 아이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놀랐다. 아이들은 훌쩍 자랐고,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어갔다. 사진에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내 삶의 가장 빛나는 시기가 사진 안에 담겨 있다. 나와 시간을 함께 보내준 이들, 그 산길, 그 계절, 그 햇볕과 바람에 대한 추억이 소중히 쌓였다.


종산식이 끝나고 나면 초안만 써둔 채 두었던 기록들을 하나씩 다시 마무리해야겠다. 산행후기까지 쓰고 나면 정말 끝난 것만 같아서 아껴두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기억이 완전히 날아가기 전에 그날의 공기 냄새, 날씨, 에피소드들을 추억하며 글로 써두고 싶다. 흐르는 글 안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내가 익어가는 시간이 담기겠지. 글로 써두면 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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