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 4구간 (고기리~권포리)
위치 : 전북 남원시 주천면 ~ 전북 남원시 운봉읍
버스 출발지 집합시간 : 새벽 2시 15분
도시락 준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들이 14세가 되었다. 중학교 입학식에서 아들은 “14세의 삶을 살라”는 말을 들었다. 부모인 나는 신입 학부모 교육에서 백두대간 동아리를 소개받았다.
백구대간은 아들과 산에 다닐 때 알아본 곳이라 관심이 갔다. 지리산부터 살악산까지 1부터 48까지 숫자가 이어진 지도를 주면서 이 길을 2년간 함께 걷자 했다.
화면에 청소년 아들, 딸과 볼을 대고 찍은 아빠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보다 아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이사 날짜가 안 맞아 입학식 이틀 전으로 이삿날이 잡혔다. 뒤죽박죽인 집에서 아들은 중학교로, 딸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이 와중에 첫 산행이 입학 한 두 번째 주
예상대로 싫다던 아들은 친구들 대부분이 산행신청한 것을 알고는 가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그러면서 "쟤네들이 열 시간 걷는 게 뭔지 알고 간다고 하는 걸까?"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딸은 예전에 살던 동네 친구네에 맡기기로 했다.
집합시간이 새벽 2시 반이라는 공지에 눈을 의심했다. 신청자명단에 동생들도 있던데 일어나 나올 수 있을까? 집합지는 집에서 차로 10분도 안 걸렸다. 124명 참가자이 버스 3대에 나눠 탔다. 우리 차량을 확인하고 버스에 오르는데 입구에서 명찰을 나눠줬다. 참가자 이름 아래 누구의 엄마, 아빠인지 쓰여 있었다.
버스는 세 시간 반을 달려 아침 7시에 들머리인 고기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밝은 해 아래서 보니 아들은 새로 산 등산화 대신에 평소에 신는 운동화를 신고 있다. 따뜻하게 입으라는 말을 했는데도 경량패딩 하나 걸치고 떨며 서 있다 친구들을 찾아 눈앞에서 사라졌다.
차량이 드문 도로 한 편에서 시산제를 지냈다. 돼지머리 대신 아기돼지 사진을 놓고 참가자들의 안전산행을 기원하는 염원을 담은 축원을 읽고 불에 태워 하늘로 날렸다. 참가자들이 한눈에 들어오자 신입과 이전 기수들이 금세 구분되었다.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면 신입 학부모고, 이물감 없이 어울리면 지원산행 온 선배였다.
시산제를 마치고 동그랗게 서서 체조를 했다. 발목을 풀고 팔과 다리를 천천히 늘렸다. 단체 사진을 찍은 후에 줄줄이 앞사람을 따라갔다. 19기 이우백두종주대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일반 산행이 산봉우리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이라면 백두대간의 한 구간은 봉우리를 3,4개 정도 넘어갔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물길로 끊기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 말한다.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로 나눠 한 구간씩 끊어 걷는데 그러다 보니 시작과 끝 지점이 산 중에서 끝난다. 백두대간 등산로 입구에는 편의점이나 식당이 없는 이유다. 남한에 있는 백두대간을 한 번에 가기 어려운 이유는 거리도 길지만 물과 식량 보급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 와보니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오늘 걸을 백두대간 4구간은 지리산자락 고기리에서 시작해 권포리까지 총 15.5km 거리다. 산 하나를 넘는 게 아니라서 산길을 걸으며 얼마큼 갔는지, 남은 거리는 얼만큼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마을 길을 통과해 첫 번째 고개를 오르는 좁은 등산로를 오르는데 길 한편에 서 있는 가족이 있었다. 우리 아들 말 대로 10km를 넘게 걷는 게 뭔지 모르고 온 것 같았다. 핏기 없는 하얘진 얼굴로 말없이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가족은 다음번 산행에서 볼 수 있을까? 오늘 온 사람이 다음 산행에도 과연 올 지 궁금했다.
두 번째 오르막을 힘들게 가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환호와 탁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양쪽에 도열한 사람들이 등산스틱으로 터널을 만들어 환영해 주고 있었다. 터널을 통과하니 청소년들이 '백두대간 종주'라고 쓰여 있는 노란 리본을 달아주었다. 선배들의 신입생 환영 행사였다.
여원재에 도착해 파란 지붕 집으로 들어가니 가마솥에 육개장이 끓고 있었다. 아무 데나 가방을 던져놓고 남색 방수포 위에 놓인 상에 자라 집았다. 오늘 점심까지 싸왔으면 등산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먼저 도착한 아들은 친구들과 둘러앉아 이미 점심을 먹고 있다. 학교 등산동아리로 오니 손이 갈 게 없다.
그동안 혼자 새벽에 운전하고, 달래 올라가고, 식당 알아보고, 불평 들어주고, 숙소 예약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무리 오늘 등산이 힘들다 한 들, 그에 비하니 쉽게 여겨졌다. 오늘의 환대와 편안함을 한껏 누렸다.
식사 후 산행은 곱절은 힘들었다. 고남산 정상석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내려와 너른 공터에 도착하니 아침에 반짝반짝 빛나던 새 배낭과 신발들이 여기저기 흙 위에 구르고 있고 지친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앉고 누워 쉬고 있었다. 나도 곁에 자리 잡고 배낭에 기대 누워 팔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손 발 끝까지 시원한 바람이 돌았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에너지가 조금씩 차올랐다.
아침 7시에 시작한 산행은 오후 3시가 넘어 끝났다. 자그마치 8시간이나 걸렸다. 백두대간 중간에 끝났으니 버스가 있는 곳까지는 구간 외 길을 걸어 내려와야 했다. 딱딱한 등산화를 신고 아스팔트 길을 걸으니 발이 아팠다. 버스가 주차된 마을회관에 밥차가 와 있었다.
짐 정리를 하러 버스에 올라가니 맨 뒷자리에 중학생들이 모여 아이엠그라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도 그 틈에 껴 있는 게 보였다. 서로 이름을 다 모르는지 이름을 떠올릴 시간을 두면서 게임이 돌아갔다. 이름만 중학생이지 초등학교 7학년의 모습 같다.
마을회관 마당에서 밥 먹으며 보니 오늘 산에 갔던 초등학생들은 남은 힘으로 운동기구를 돌리거나 뛰어다녔다. 아이들은 산을 타는 동시에 회복되었나 보다. 초록색 잠바를 입고 뛰어다니는 까만 긴 머리를 한 아이는 우리 딸과 같은 1학년이라고 했다. 최연소 참가자였다. 너도 오늘 산을 탔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밥 먹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계속 도착한다. 뒤로 갈수록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한쪽씩 들어 올리기도 하고, 다리를 끌기도 하며 온다.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사람이 보이자 사람들이 모여 박수를 쳐주었다.
버스를 타기 전에 초코파이를 쌓아 만든 케이크에 초를 켜고 이번 달 생일자를 찾아 고깔을 씌워주고 축하해 주었다. 백두대간 첫 산행도 축하했다. 이제 백두대간 720km 중 700km가 조금 넘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