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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나무 Nov 10. 2023

등산 10시간, 15km를 걷는 맛

- 백두대간 4구간 고기리~ 권포리

쌓여있는 이삿짐만큼이나 피로도 산처럼 쌓여 있는 몸을 이끌고 첫 산행 버스에 올랐다. 아들은 비몽사몽간에 새로 산 등산화 대신 학교 갈 때 신는 운동화를 신고 있다. 이름표를 받고 자리에 앉으니 버스가 출발했다. 눈 감았다 뜨니 도착지였다. 잠이 덜 깬 채 버스에서 내려 2차로 한쪽에 모였다. 예쁜 돼지 그림 액자가 놓인 상을 향해 섰다. 말로만 들어본 시산제였다. 한 해 안전 산행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고 하늘로 종이를 태워 보냈다. 그리고 둥글게 모여 서 발목을 돌리고 허리를 앞 뒤로 구부리며 체조를 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하며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앞장서자 그리로 줄줄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중1과 고1 신입생과 부모들이 참가자의 대부분이었다. 새 등산복, 새 등산화, 새 배낭이 눈부신 가족도 있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신입들과 달리 서로 뭉쳐 다니며 여유 있게 웃고 있는 이들은 백두대간 종주 마무리를 앞둔 선배들이었다. 종주 2년 차인 작년에 끝났어야 하는데 코로나로 미뤄져 산행이 아직 몇 구간 남아있다고 했다. 2년 터울로 선배들에게 산행에 필요한 무전기를 물려받고 초행 산길 도움도 받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 동아리구나. 학부모 OT때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각자 앞사람 따라가기 바빠 눈인사만 잠깐 나눴다. 우리가 이사하느라 정신없던 사이 두 차례의 예비산행으로 역할들이 정해져 있었다. 시산제에서 축문을 이가 이번기수의 산행대장이라고 했다. OT때 우리 테이블에 앉았던 신입생 아빠였다. 


아들 말대로 열 시간의 산행이 뭔지 모르고 참가한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오르막길이 연속되는 계단을 정신없이 올라가고 있는데 한쪽에 핏기를 잃은 하얀 얼굴을 한 엄마, 아빠, 신입생으로 보이는 아들 셋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말없이 서 있었다. 일반 산행이 봉우리 하나를 정해서 정상까지 다녀오는 것이라면 백두대간은 봉우리를 3,4개를 넘어야 했다. 등산의 끝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잘 정비된 길이 아닌 곳도 있어 길을 잃기도 쉬웠다. 앞사람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했다. 우린 아직 이름도 서로 모르는 사이 아닌가? 이름표가 뒤집어져 있으면 부를 수도 없었다. 수정봉에 도착하자 정상석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분이 있었다. 아이와 그렇게 여러 산을 다니는 동안 내 변변한 사진 한 장 없는데 '역시 학부모 동아리는 대단하다' 싶었다. 첫 산행을 축하해 주기 위한 여러 이벤트가 있었다. 굽이굽이 언덕을 넘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환호소리가 들렸다. 등산스틱으로 'ㅅ' 자 터널을 만들어 스틱을 치며 환영해 줬다. 산에서는 이렇게 노는구나! 마을을 통과하는 구간이라 점심은 마을에서 먹고 갔다. 안내를 따라 어느 집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솥에 육개장이 끓고 있었다. 마당에 파란 깔개 위에 놓인 상에도 앉고, 툇마루에도 앉고, 여기저기 앉아 밥을 먹었다. 반짝이던 배낭들이 아무 데나 뒹굴고 있었다. 점심 먹고 하는 산행은 더 힘들었다. 겨우 풀린 몸이 다시 시작할 때처럼 힘들어졌다. 점심은 먹어야 하니 괜히 쉬었다고도 할 수 없고, 끙끙 거리며 다시 스스로 몸을 밀며 올라갔다. 이번엔 산 하나 넘으니 응원 플래카드가 걸려있고 꽁꽁 언 설레임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나눠준다. 이건 정말 감동적이었다. 설레임을 빨아먹는 동안 다리의 고통이 사라졌다. 산에서 받을 수 있는 응원과 선물은 다 받아 가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넘어야 하는 산이 고남산이었는데 고난의 산이었다. 정말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내서 넘었다. 내리막길 끝에 완만하게 경사로 넓게 펼쳐진 공터가 나왔다. 아래 아스팔트 길이 보였지만 더 가지 않고 사람들이 그곳에 모두 누워 쉬고 있었다. 나도 배낭을 등에 깔고 맨바닥에 다리를 뻗고 누웠다.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깜빡  잠들기까지 했다. 이렇게 힘들다니, 다시는 못 오겠구나.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버스가 와 있었다. 마지막 길을 걷는데 두 손으로 한 발을 들어 옮기고 다음 걸음은 또 손으로 다리를 들어 올려 걷기는 사람이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다리로 걷는 게 아니라 발을 끌며 가는 사람도 봤다. 오늘 참가한 모두에게 산행 열 시간과 백두대간 15km라는 거리가 또렷이 새겨졌다. 놀랍게도 오늘 산행에서 제일 걱정되었던 동생들이 마을회관 운동기구들을 돌리며 놀고 있었다. 중학생 아이들은 버스 뒷자리에 모여 '아이엠그라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도 그 틈에 있었다. 아들은 버스탈 때 아빠 옆에 앉아 가는 모습 보고 도착해서 친구들 찾아간다고 떠나는 뒷모습을 본 이후에 처음 얼굴을 보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아들을 달래며 갈 필요도 없고, 내가 운전해 데려갔다가 빨리 집으로 가자는 성화에 쉬지도 못하고 다시 운전해 돌아갈 필요도 없다. 게다가 식사까지 주어 음식을 챙기거나 식당을 알아보는 일도 내가 안 해도 되었다. 어머, 이거 할 만 한데? 무엇보다 중학교 가면 아이 생활하는 모습은 이제 못  본다 여겼는데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이 눈앞에서 보인다. 버스에 짐 가지러 올라가 보니 조심스럽게 서로 알아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 게임이 박력 있게 진행되기보다 서로 이름을 떠올릴 시간을 두고 돌아가고 있다. 백두대간을 걷는 동안 아이들이 크고 관계가 깊어갈 수 도 있을 것 같다. 어머, 이건 놓치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다 안 푼 이삿짐은? 오늘 탈탈 털린 내 몸은? 친구네 맡긴 둘째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으니 다음 참가는 2주 간의 숙려기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탕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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