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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나무 Nov 17. 2023

새벽 2시, 한국도자기 사거리

백두대간 5구간 권포리~복성이재 15.5km

두 번째 산행 공지가 떴다. 신청인원이 줄지 않았다. 아직까지 선배기수가 같이 산에 가주고 있기도 하지만 1차 산행하고 절반은 안 올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다. 하긴 우리 가족도 신청했다. 게다가 8살 둘째까지 신청했다. 어쩌려고! 


첫 산행을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다시는 오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하산과 동시에 기억이 막 편집되기 시작했다. 마을회관에서 후미를 기다리는 동안 눈앞에 함께 산을 탄 초등학생들이 운동기구를 돌리며 놀았다. 15km 산행을 하고 온 인간이 저럴 수도 있구나 깨닫는 순간이었다.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내려온 어른들도 밥 한 끼 먹고 막걸리 한 잔 하고 나자 기분이 좋아졌다. 죽을 맛은 다 사라지고 이 맛에 오지, 만 남기고 간 걸까. 긴 코로나 끝에 그동안 못한 야외활동과 단체활동에 대한 욕구들이 터진 걸까. 이유야 어떻든 2차 산행 인원이 줄지 않았고 우리 가족도 거대한 망각의 흐름에 같이 올라탔다. 


초록색 등산잠바를 입고 까맣고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마당을 뛰어다니던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최연소 참가자였는데 우리 딸과 동갑인 8살이라고 했다. 우리 딸은 떼쟁이라 도저히 데려올 수 없는데 이 아이는 어떻게 가능한 거지? 우리 딸은 아빠에게 업어달라고 할 게 뻔한데 이 아이는 어떻게 혼자 걸어 산을 넘은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설아 부모님께 물어보니 설아는 고1오빠와 중2언니가 있는 셋째라고 했다. 우리 딸에 뒤질 게 없는 떼쟁이 조건이 충분했다. 딸과 함께 가는 백두대간은 계획에 없었다. 첫째도 10살이 되어서야 산에 처음 데려갔다. 게다가 첫째의 눈빛이 바뀌고 엄마 말에 대답을 안 하는 시간이 쌓여가면서 깊은 분노의 힘으로 산을 올랐었다. 둘째는 아직 산을 힘들게 넘을 동기가 없는데? 


올 초에 서울 북부에서 경기 남부로 이사 와서 1차 산행을 가기 전 날 딸을 먼저 살던 동네에 친구네 맡겼었다. 금요일에 강남을 통과해 아이를 데려다주고 오니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충청도 시댁 가는 것보다 더 오래 걸렸다. 열 시간 산행 다녀와 다음 날 만신창이의 몸으로 운전해 가서 데리고 오는 것도 힘들었다. 이번에 또 맡기고 갈 데도 마땅치 않고 그렇다고 버스만 타면 되는 등산을 안 가자니 좀 서운하고. 그래서 결국 계획에도 없는 둘째를 데려가게 되었다. 쉽게 산을 넘은 것도 모자라 운동기구를 타며 놀고 있던 동갑내기 설아를 보니, 우리가 그동안 우리 딸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걸 지도 몰라! 


새벽 두 시에 한국도자기 사거리에 다시 모였다. 텅 빈 거리에 관광버스 두 대가 서 있다. 아들은 또 새로 산 등산화 대신 운동화를 신고 왔다. 내 현관에 신발들을 싹 다 치워놓을걸! 딸은 비몽사몽간에 차에서 내려 버스로 옮겨 실어졌다. 그래, 새벽엔 졸리니까 그럴 수 있지. 이따 도착하면 잘할 거야. 설아는 어디 있나? 정신을 못 차리는 우리 딸과 달리 눈이 초롱초롱해 있는 설아가 보인다. 


저번에 백두대간 4구간을 걷고 이번에 5구간을 걷는다. 버스에서 내려서 보니 익숙한 마을회관이 보인다. 우리가 둘째 산행에 희망을 보았던 운동기구들이 새벽 어스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희망의 공터에 동그랗게 모여 체조를 시작했다. 딸은 어리둥절 해 하면서도 언니 오빠들을 따라 체조를 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한 명 더 등장하자 사람들이 반가워해주었다. 녹색 잠바를 입은 설아와 비슷한 체형에 빨간 등산잠바를 입고 설아 보다 머리숱이 좀 적은 까만 긴 머리를 찰랑이고 있는 아이가 우리 딸이다. 단체 사진을 찍고 초, 중, 고 아이들만 모아 한 번 더 찍었는데 참가한 아이들의 숫자가 꽤 된다. 플래카드 뒤로 촘촘히 서서 2,3줄을 이룬다. 산행을 시작하는데 아들은 친구 찾아 벌써 사라지고 없다. 남편이 앞쪽에서 아들과 같이 가기로 했다. 나는 딸과 함께 사람들 사이에 적당히 끼어 섰다.  


저번 산행에 더웠어서 며칠 전부터 물을 얼려 놓았었다. 가벼운 선글라스도 한편에 꼽아왔는데 웬걸, 오늘은 바람이 차다. 배낭에서 냉기까지 흐르니 더 추웠다. 딸은 한랭알레르기가 있어서 갑자기 추우면 가려워한다. 더울까 봐 홑겹 바지를 입혔더니 허벅지를 긁기 시작한다. 마을 길을 굽이굽이 돌아 이제 산으로 들어서려 하는데 어쩐담. 비상약에서 알레르기 약이 있어 받아 먹이고, 누가 패딩 조끼를 빌려주어 입히니 다리까지 다 가려진다. 한 고비 넘기고 계속 걷는다. 산으로 들어서자 여기를 어떻게 아이를 데려올 생각을 했지 싶게 오르막길이 계속 나온다. 초반이라 쉬운 코스들을 배치했다고 했는데 우리 딸도 쉽다고 느낄 수 있을까?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딸이 힘들다고 떼가 나올 때 즈음 되면 오르막에서 정체되어 멈춰 있는 언니들이 보여 힘든 걸 잊고 뛰어가길 반복했다. 이마저도 등산 시간이 길어지자 사람들 간격이 벌어지며 딸이 언니들을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엄마 등 밀어, 엄마 나 끌고 가. 요구가 끝이 없다. 딸과 나는 어느새 맨 꽁지에 와 있다. 대열의 끝을 지키는 후미대장님들은 우리가 멈추면 저만큼 뒤에 멈춰 섰고 우리가 출발하면 다시 따라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끝까지 어떻게 가지 고민하고 있는데 엄마가 먼저 가라고 후미대장님 중 한 분이 말씀해 주셨다. 그러고 보니 학부모 가이드에 산행에선 자기 아이를 챙기지 말라고 나와있던 게 떠올랐다. 아이가 치대는 걸 보고 내 배낭은 이미 누군가 매고 가버렸다. 딸에게 엄마 배낭 찾아온다고 하고 앞서 가기 시작했다. 오르막 구간이 나올 때마다 여길 딸이 어떻게 넘어올지 걱정되었다. 그러면서도 딸과 간격이 붙을까 쉬지 않고 갔다. 아까처럼 치대며 엉겨오는 딸을 데리고는 도저히 갈 수 없다. 어찌나 잰걸음으로 갔던지 남편과 아들이 있는 선두까지 와버렸다. 남편은 딸을 뒤에 두고 왔다는 말에 놀란 것 같았다. 방법이 없다. 하산해서 무사히 내려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산을 잘 타는 선두와 그날 컨디션이 안 좋거나 초행인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한 시간 이상 났다. 오늘은 어린아이가 후미이니 두 시간까지 벌어졌다. 초조하게 남편과 내가 하산길 끝에서 딸을 기다렸다. 후미를 응원하기 위해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으며 여럿이 함께 기다렸다. 첫 번째 버스는 우리 아들을 포함해서 하산한 사람들을 가득 싣고 이미 식당으로 갔다. 두 번째 버스는 마지막 사람까지 도착해야 출발할 수 있었다. 설아는 이미 도착했다. 후미가 무전으로 선두가 남긴 방향표시 종이를 수거할 때마다 선두 통과 시간과 현재 통과시간 차이를 알려줬다. 아무리 쉬운 코스라고 해도 긴 산행에 지쳐가니 뒤로 갈수록 시간은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저 길 끝에 빨간 잠바가 보였다!   


"우두두두두두두..... " 딸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달려온다. 어머! 지친 기색 하나 없잖아! 이건 마을회관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모습 아니던가. 나에게 먼저 가라고 조언했던 후미대장님들께 들으니 저 봉우리에 올라가서 "엄마"하고 크게 부르면 엄마가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하면 고개까지 오르고, 엄마 한 번 부르고 씩씩하게 가다 봉우리 하나 또 오르고 오르고 하며 잘 왔다고 전해주신다. 밥을 다 먹은 딸은 초등학생 무리에 섞여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다. 식당 마당에서 초록 잠바를 입은 설아와 빨간 잠바를 입은 우리 딸이 검은 긴 생머리들을 날리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모습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 동생 참가 소식에 피식 웃던 아들도 동생이 완주하고 왔다고 알리자 눈이 휘둥그레진다. 


백두대간 종주 할만하네! 

3차 산행도 또 가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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