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간 : 백두대간 7구간 (중재-육십령)
위치 : 전북 장수군 번암면-장계면
날씨 : 최저 15도-최고 25도
산행거리 : 21.6km (마루금 20.1km+구간 외 1.5km)
소요시간 : 선두(12시간) 후미(13시간 25분)
참여인원 : 60명
정리되지 않던 이삿짐은 손님맞이를 앞두고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집들이로 산행을 한 차수 쉬었다. 빠진 구간은 날을 잡아 가족끼리 보충산행을 가야 할 것이다.
이쯤이면 체력이 올라왔다고 여기는지 다시 돌아온 산행의 거리가 20.1km였다. 출발시간이 새벽 3시에서 새벽 0시로 당겨졌다. 앞으로 더워질 날씨에 대비해 새벽산행 연습도 겸한다고 했다. 새벽산행과 20km 산행은 무리라 둘째는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
거리 때문인지 참석자가 줄었다. 60명이 신청해 처음으로 버스 2대로 출발했다. 금요일에 딸은 친구네 맡기고 하교한 아들에게 0시 출발이니 씻고 빨리 누워야 한다고 재촉하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자기는 그냥 안 가면 안 되냐고 퉁명스레 묻는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걱정되는 것만 얘기하고 내가 할 준비만 서둘러 마쳤다. 수면 시간 부족을 걱정하던 남편도 늦게 퇴근했다. 9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누웠다.
“엄마! 늦었어!!”
핸드폰 알람을 다 같이 못 들었나 보다. 우리에게 전화해도 받지 않으니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버스에 집합시간이 이미 지나있다. 등산복을 입고 잔 터라 현관 앞에 싸 놓은 배낭만 집어 들고 새벽길을 질주해 갔다. 우리가 타고도 버스가 출발하지 않아 밖을 보니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가족이 또 있다. 백두대간을 향하는 새벽 0시의 질주가 또 있었다.
덕유산 휴게소에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많았다. 대부분의 목적지가 덕유산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와 사찰로 가는 버스도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와 버스 타자 안전대장님이 머릿수를 세고 다녔다. 다들 비몽사몽인 시간에 챙기는 손길 하나를 확인했다.
새벽 3시 반에 지지계곡에 도착해 아침 보급품으로 주먹밥을 받았다. 부상을 막기 위한 체조도 꼼꼼하게 했다.
그 많던 관광버스는 어디로 갔는지 등산로에 우리 버스만 홀로 있었다. 헤드렌턴을 끼니 반딧불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산길 입구에서 대장님 한 분이 아이들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멧돼지 소리가 들리고 있으니 여기부턴 조용히 가야 한다고 하니 아이들이 웅성거림이 금세 잦아들었다. 곧 다시 커졌지만.
새벽 3시 45분, 선두대장님의 산행시작을 알리는 무전이 곳곳에 배치된 무전기로 타전된다. 너무 이른 산행 때문인지 초반부터 환자가 발생했다. 체한 것 같아 손을 따고 약을 먹고 했다.
버스는 출발 후 두 시간은 하산자를 대비해 기다리기고 있어 잠시 지켜봤다. 다행히 컨디션이 좋아져서 산행에 합류해 다시 출발했다.
렌턴을 달고 걷고 있으니 멀리 있어도 불 빛으로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초반에 환자가 발생했어도 선두와 많이 차이 나지 않아 보였다.
날이 밝아 오는지 새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해 잠바를 벗었다. 잠바를 가방에 넣기 위해 멈춘 것 말고는 해가 뜰 때까지 쉬지 않고 올랐다. 깜깜 한 데서 멈춰 있는 것보다 걷는 게 나았다. 아침 6시 45분, 산행 시작 3시간 만에 선두가 첫 번째 봉우리에 도착했다는 무전이 들렸다.
이 시간에 해발 1300미터에 올라 아침 먹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안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랬다. 백운산에서 기다리고 있는 선두를 만나 산 정상에서 아침을 먹었다. 남편과 아들을 만나 정상석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식사를 마친 선두가 먼저 출발했다.
오늘 산행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 인서의 발전이 눈부셨다. 첫 산행 때 인서가 너무 힘들어하고 있는데 주변에 부모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둘째를 데려오지 않을 때라 '내 아이와 함께 가지 않는다'는 걸 모를 때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모님은 가이드대로 다른 집 아이들을 챙기며 가고 있었다. 그 힘들어했던 인서가 오늘은 엄마, 아빠, 언니를 다 제치고 선두 그룹에서 갔다.
내 키를 넘는 조릿대 숲을 지나며 둘째를 안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이 얼굴이 풀에 쓸렸겠다. 스틱으로 조릿대 사이를 벌리며 빠르게 갔다. 초반에 체력이 있을 때 최대한 많이 가야 한다.
긴 산행을 하다 보니 체력을 최대한 아끼고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방법에 골몰하게 된다. 간식은 뭘 먹을까, 얼마 만에 쉬어야 할까 등등. 돗자리를 펴고 누워서 쉬는 가족을 보니 회복이 빠를 것 같았다.
수많은 등산 용품들이 뭐가 그렇게 다 필요하고 차이가 있을까 싶었는데 장거리를 산행을 해보니 차이와 필요가 느껴졌다. 배낭 형태, 스틱의 무게, 신발에 예민해졌다. 자기에게 맡는 것이 있고, 산행형태에 적합한 것이 따로 있었다. 잘 맞는 장비는 산행을 훨씬 쉽게 해 주었다. 체력이 한계에 왔을 때 때 이 차이는 컸다.
산행 6시간째, 오전 9시 50분 선두가 두 번째 봉우리 영취산에 도착했다는 무전이 들렸다.
날씨요정이 함께 하고 있는지 날이 적당했다. 더웠으면 긴 거리에 물이 부족했을 텐데 다행히 흐렸다. 바람 불면 살짝 추울 정도였다. 해가 나면 잠바를 벗었다가 풀 숲이 나오면 다시 입었다. 입었다 벗었다를 계속하며 체온을 조절했다. 그래야 덜 지칠 터였다.
걷는 길이 길어지니 이야기보따리를 계속 풀며 가게 된다. 엄마들은 백두대간을 아이와 함께 다녀보니 아이가 자기보다 훨씬 잘 가는 걸 보고 잔소리가 줄었다는 얘기를 했다. 초등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 내용으로 수수께끼를 냈다. 전국에 있는 고인돌 개수가 몇 개인지, 청동기는 어떻게 만드는지 서로 물었다. 아이들 안에 들어있는 산 길에서 흘러나왔다.
"학교와 핵교의 차이가 뭔지 알아?"
"학교는 학생이 다니는 거고 핵교는 할머니 손자가 다니는 거야?
"아니, 학교는 '다니는 거'고 핵교는 '댕기는 거'야!"
넌센스 퀴즈도 오간다.
걸음 속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자연스레 모여갔다. 아직 허벅지 힘이 덜 붙은 엄마들과 어린 친구들이 후미다. 아이들이 "쉬었다가요", "오줌 마려워요", "신발에 뭐 들어갔어요" 할 때마다 멈추니 선두와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선두와 시간이 33분 차이로 벌어졌다는 무전이 들려와 아이들과 조금 속도를 내보기로 했다. 숨을 헉헉 거리며 갔더니 선두가 모여있는 곳이 나왔다.
20km 산길의 고도변화는 아이스크림 콘에 끼는 종이를 납작하게 눌러 접어 반으로 접은 모양이었다. 고깔 끝점에서 완만하게 끝까지 오르막이다가 마지막에 뚝 떨어졌다. 그 마지막 뚝 떨어지기 직전에
"난 고관절에서 심장이 뛰어"
"난 난 발바닥에 심장이 가 있네"
"난 발가락에서 심장이 뛰어!"
라며 올랐다.
오후 2시 25분. 산행 10시간 40여분 만에 선두가 세 번째 목표지인 구시봉에 도착했다는 무전이 들렸다. 나는 선두 바로 뒤 그룹에서 가고 있었는데 이때 사람들은 힘든 상태를 지나 그 이상의 어떤 상태로 걷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발목이 꺾이려 하는 것을 정신력으로 컨트롤하며 가고 있었다.
마지막 800m를 남겨두고 내리막길로 내리 꽂히던 길이 다시 오르막으로 멱살을 끌더니 다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니 다시 오르막이 나왔다. 이 구간의 끝은 언제쯤 어떤 모양으로 나올까. 끝을 상상하며 걷고 또 걷는데 선두가 버스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정말 육십령이 코 앞이구나!
날머리 이후로는 식당에 잠깐 들렀다 버스 앉아 눈을 감았다 뜨니 도착해 있었다. 그야말로 "레드 썬" 하는 동안 순간이동 한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비가 왔다. 모두 하늘에 대고 날씨 요정님께 감사하다고 했다.
60명의 전사가 손에 손을 잡고 20km를 넘고 돌아왔다. 나도 그중 하나라는 게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