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주 한 모금과 소주 세 잔 사이의 간극
나는 술을 잘 못 마신다. 술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져서 사람들이 놀란다. 눈 알 까지 빨개지기도 하고, 목, 팔, 화장실에서 보면 배까지 빨개져 있다. 분위기에 취해 몇 잔 더 먹는 날에는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짖꿎은 친구들은 내가 졸기 시작하는 시간을 자리가 파하는 시간으로 정하기도 한다. 아세트알데히드라는 알코올분해 효소가 몸에 없어서라고 하던데 하여간 내 주량은 그렇다.
운동을 하며 가끔 인바디라는 것을 재었다. 체중계처럼 생겨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봉이 추가된 모양이었다. 안내대로 체중계에 올라 봉을 잡고 서 있으면 체지방과 근육량을 알려주는 신통방통한 기계였다. 2주에 한 번씩 재었었는데 운동 코치는 체지방과 근육이 둘 다 줄어든 50점, 체지방만 줄어든 것은 100점, 체지방은 줄고 근육은 늘어난 것은 200점이라고 했다. 근육량을 꽤나 중요시했다. 나도 운동하며 보니 체중계의 숫자가 줄지 않더라도 몸이 바뀐 것처럼 보이는 눈바디가 생기기 시작했다. 몸무게에 큰 변화가 없어도 몸이 탄탄하게 느껴지며 예전처럼 몸이 무겁지 않기 시작했다.
근육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해나가다 보니 체중계의 숫자는 조금씩 점점 줄어들었고, 근육은 미미하게라도 늘었다. 사람마다 근육이 잘 느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다는데 친구와 나를 비교하면 내가 좀 더 잘 늘고 친구가 변화가 없는 편이었다. 그에 비해 체지방은 친구가 더 잘 빠졌다. 친구와 함께 운동하니 아침 사과와 계란, 점심 일반식에 밥만 반 공기 줄여서, 저녁은 샐러드에 단백질 필요 양에 맞게 식단도 잘 지켜갔다. 같이 장보고 같이 술 마시고 같이 운동하니 평소 대화할 때도 운동한 것 복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주말에 여러 가족이 모여 함께 저녁 먹고 술 한잔 했다. 새로 왔다는 막걸리도 맛보고 맥주도 한잔씩 하고 있는데 얼굴이 안 빨개졌다! 맛있는 막걸리를 주문해서 초대하고, 과메기 철에는 과메기를 주문해서 술자리에 초대해 주던 친구는 내 모습에 자기가 뿌듯하다며 자찬했다. 심지어 그날은 졸지도 않았다! 함께 하던 이들이 내 변화에 재밌어했다. 꾸벅꾸벅 졸 시간에 말똥말똥하게 앉아 있으니 신기해들 했다. 운동한다고 주량이 는 건가?
그 이후에 내 몸에 대한 실험이 계속되었다. 운동을 꾸준히 해가면서 술자리가 있으면 맥주 한 모금을 마시며 어떻게 변하나 관찰했다. 조금씩 늘려가다 보니 맥주 500cc 한 잔을 다 마셨는데도 괜찮았다. 한 여름의 수많은 날들을 거치며 맥주 주량이 늘었다. 어느덧 500cc 두 잔까지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취하지 않고. 어묵탕에 소주를 마시는 계절이 왔다. 늘 소주만 마시는 옆집 아빠의 소주를 한 잔 마셔봤다. 내 모습에 다들 재밌다고 깔깔 대었고 나는 빨갛게 변하지 않는 내 모습에 눈이 동그래졌다. 소주도 한잔, 두 잔, 세 잔까지 마실 수 있었다. 내가 소주 석 잔 까지 마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는 가볍게 맥주 한잔 하는 자리에서 혼자 소주를 시켰다. 그리고 석 잔을 마시고 나면 반 명이 남았다. 주로 집 앞에 치킨집에서 어린이집 학부모들과 어울리다 집으로 걸어왔는데 반 병 남은 소주를 주머니에 넣어왔다. 그렇게 가져온 소주병이 냉장고 맨 위칸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새로운 술이 생겼다며 같이 마시자고 집에 찾아오는 이도 생겼다. 그 해 겨울은 주량 실험과 새로운 주종 테스트로 즐겁게 보냈다.
이사 오고 운동을 예전처럼 못하게 되자 근육을 잃는 것만큼 주량도 다시 잃었다. 어느새 다시 얼굴이 빨개지고 마시다 보면 졸려서 꾸벅 꾸벅 졸기 시작한다. 삶의 질이 그만큼 떨어졌다. 다시 운동 리듬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근육운동도 하고 달리기도 시작했다. 어묵탕에 소주를 먹는 계절이 왔건만 소주는 꿈도 못 꾸고 있다. 눈알까지 빨개지면서 술을 마시고 싶진 않다. 다시 한번, 그 해 겨울을 떠올리며 온몸의 근육들을 골고루 괴롭혀주고 있다. 허벅지, 엉덩이, 등 큰 근육들아 운동하고 식단 할게 잘 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