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나름 국가고시다
3월 1일, 본격적인 백수생활이 시작되었다. 연차 소진때문에 4대보험 상 퇴사일은 3월 8일이었으니 아직은 직장인이라고 외치고 다녔지만, 백수는 백수였다. 근 3년 넘게 '한번도 안깨고 자본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꿀잠이라고 불릴만한 잠을 잤다. 3월 1일 대한독립만세와 퇴사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는 기분은 그 무엇보다 짜릿했다. '고생했으니 푹 쉬어야지'라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한 백수 생활이었지만 퇴사를 결심하며 세웠던 두 가지 목표의 달성을 위해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았다.
그 때 당시 세웠던 두 가지 계획은 바로 운동과 운전면허. 잦은 음주와 불규칙한 생활 그리고 스트레스는 4년 동안 몸을 착실히 망치기에 아주 적당했고 이러다 일찍 죽겠다 싶어 운동을 시작했다. 태생적으로 집에서 뭘 하는걸 좋아했기에 닌텐도 스위치와 덤벨로 홈트를 시작했다. 1년 반이 넘게 지난 지금도 주 5일 홈트 중이니 매우 성공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겠다. 운동처럼 운전면허도 성공하면 참 좋았겠지만 그렇다면 글 제목이 '아홉수'가 아니었겠지?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금도 운전을 못하는 상태다. 참고로 1종 아니다.. 2종 보통이다..
퇴사를 하며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결심했던 이유는 꽤나 많았다. 일단 운전에 대한 로망이 있었기도 했고 그래도 30살 전에 면허는 따두어야 싶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으며 언제나 혼자 운전하는 남자친구와 고통을 분담하고 싶었고 이 때 아니면 정말 못딸거같기도 해서였다. 공간지각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나였기에 (어렸을때 전개도 머리에서 구조화가 안되서 다 외우고 시험봄) 독학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바로 학원에 등록하였다.
학원에는 예상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면허를 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멋있게 도로를 달리는 스스로를 상상하며 필기시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남자친구는 '그걸 그렇게 공부를 해?' 라고 물었지만 자기객관화가 매우 잘되는 편인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합격을 위해서도 아니고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타인을 위해서.... 책을 사서 공부하지는 않았고 기출문제를 미친듯이 풀어 거의 정답을 내뱉는 수준으로 하고 필기시험을 치뤘다.
순탄하게 필기합격을 거치고 처음으로 운전대를 잡아보는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능시험은 합격만을 위해서 매우 '교과서적으로' 가르쳐주시는데 예를 들어 '3번째 커브에서는 오른쪽으로 핸들 두바퀴 반' 이런 식이다. 교육방식의 문제였을까? 나는 오만하게도 기능시험에 떨어질 일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으며 운전을 나름 잘하는 편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자신감도 붙었다. 그러나, 운전은 현실이었고 중간부터 멘붕에 빠진 나는 1점차이로 기능시험에 불합격했다. 그리고 생각이 들었다. '나 정말 운전해도 되는거야?' 온갖 커뮤니티 글과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기능시험에 떨어진 분들의 후기를 찾아 읽으며 유튜브 기능시험 영상을 찾아헤맸다.
기능시험에 떨어지고 나니 도로의 운전자들이 너무 대단해보였다. 타인의 운전영상을 50번쯤 돌려보고 나서야 운전은 '정산 매뉴얼'이 아니라 '행사 현장 이슈 대응' 이라는 것을 깨닫고 2번째만에 기능시험에 합격했다. 대체 1종 합격하신 분들은 운전을 얼마나 잘하시는걸까.
대망의 도로 주행. A~D 코스로 이루어진 도로 주행은 예상보다 괜찮았다. 오히려 기능시험보다 괜찮았는데 일단 선생님이 꽤나 프리한 스타일로 가르쳐 주시기도 했고, 내가 시험 본 동네의 특성상 '어린이 보호구역'이 엄청나게 많아 속력을 낼래야 낼 수 없었으며 옆자리 선생님에게 브레이크 페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능에 이미 한번 떨어져본 경험이 있던 터라 도로 주행만큼은 한 번에 합격하고 싶었고 남친을 대동해 코스를 한 번씩 돌아보기도 하며 열정을 불태웠다. 그리고 도로주행 당일, 가장 쉬웠던 코스를 운좋게 골라 당당히 합격증을 받아든 나는 이제 프로 운전러로 거듭나리라! 다짐하며 남자친구의 차에 보험을 등록해두었다.
술을 처음 마셔본 날처럼 어른이 된 기분이었달까.
글 초기에 아직도 운전을 못하는 상태라고 적었기에 면허 취득에 실패한 줄 알았던 분들도 계실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당당히 국가 자격 시험에 합격하여 2종 보통 운전면허증이 있는 사람이다. 보험도 등록했겠다, 차도 있겠다, 면허도 있겠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라서 운전을 못하고 있는 것이냐고 묻는 다면 당당히 고개를 들어 시험과 실전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시험차가 아닌 일반차로 했던 첫 도로 주행은 그야말로 공포와 대환란의 1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