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주인은 내 자신입니다.
이기주 작가님의 '마음의 주인'을 읽었습니다.
<언어의 온도>,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말의 품격>을 통해서,
저에게 큰 위로를 건네주었던, 이기주 작가님의 '마음의 주인'의 기억하고 싶은 표현들을 적어 봅니다.
행복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happiness'는 '행운' 또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라는 뜻을 지닌 중세 영어 'hap'에 뿌리를 두고 있다.
행복은 수많은 우연과 우연이 그야말로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 서로 포개지고 스며든 결과인지 모른다.
(중략)
행복을 향한 첫걸음은, 무조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행복은 그야말로 우연히 일어난다(P.18~21)-
길을 뜻하는 단어 'road'와 짐을 뜻하는 'load'의 철자가 비슷하다. 그래서일까, 사람마다 삶의 방향이 다른 만큼 저마다 다른 짐을 어깨에 지고 살아간다.
삶의 무게가 어떠한지는 그 짐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만 안다.
단, 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순간 혼자만의 힘으로 스스로를 떠받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간의 마음은 늘 기댈 곳을 필요로 한다.
-마음도 무언가에 기대야 쉼을 얻는다(P.42~44)-
사랑은 때로 상대방의 눈물을,
눈물이 아닌 웃음으로 대한다.
웃음으로 눈물을 닦아준다.
그 웃음에 깃든 진정성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위로가 아닐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마음(P.81~84)-
"산악 사고 대부분이 하산길에 발생한다는 거 알아? 나 역시 산을 오르는 일보다 내려가는 일이 훨씬 어렵게 느껴지더라. 하기야 인생도 그렇잖아!"
난 이 얘기를 듣자마자, 올라갈 때 만나는 사람들을 잘 대해야 하는 이유는 내려올 때 그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라는 미국 극작가 윌슨 미즈너의 말을 떠올리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마음속에는 어떤 산이 있을까(P.108~110)-
꿈을 뜻하는 한자 몽(夢)의 갑골문이 흥미롭다. 침대에 누워서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꿈 외에도 '어두운' '흐리멍텅한' 등의 의미를 지닌다. 꿈의 본질이 그렇다. 본래 꿈은 흐리고 어두워서 쉽게 잡히지 않는 것이다. 현실만큼 선명하지 않다. 그 밝기와 선명함이 크게 차이가 나는 탓에 둘 사이엔 상당한 격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꿈을 꾸는 상태를 가리키는 '꿈꾸다'라는 동사는 붙여 쓰지만 '꿈 깨다'라고 적을 땐 '꿈'과 '깨다' 사이를 띄어서 쓰는 것도, 이와 아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현실은 선명하고 꿈은 흐리멍텅하고(P.130~132)-
최근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과일도 커다란 상자에 드문드문 담을 때보다 작은 상자에 다닥다닥 보관할 때 훨씬 빨리 썩는다고, 어느 직원이 알려주었다.
숨 쉴 공간이 필요한 게 어디 과일뿐이랴. 사람 사귐도 때로는 적당한 틈이 필요하다.
일찍이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사람을 대할 땐 불을 대하듯 해야 한다. 다가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접근하고, 멀어질 땐 얼지 않을 만큼만 떨어져라"라고 말하면서 인간관계야말로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략)
내 존엄성을 짓밟혀가면서까지
마땅히 유지해야 하는 인연은 없는지도 모른다.
나를 빼앗기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관계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온 힘을 다해 벗어나야 하는 굴레에 불과하다.
-때론 관계가 아니라 나를 지켜야 한다(P.154~158)-
한때 내가 다니던 회사에도 강마에처럼 타인의 단점을 발견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간이 입으로 쏟아낼 수 있는 추잡한 표현의 한계를 거뜬히 초월하는 그들의 저열한 화법을 면전에서 받아낼 때마다 나는 마음이 더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나는 직접 그런 일을 겪거나 목격함으로써 그들의 내면세계를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아, 이 사람은 작은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불안 요인이 생기면 그것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도망치기 바쁘구나. 남을 헐뜯고 공격하는 행위를 통해 불안함에서 벗어나려 하는구나. 어쩌면 이들은 사악한 사람이 아니라 나약한 사람인지도 몰라.'
(중략)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저 사람이야말로 어디 가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이 시대의 참스승이야, 참스승!'
-가끔은 그릇되게 말하는 사람에게서 배운다(P.165~167)-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시름만 깊어가던 어느 날, 로스 힐드(에마 톰슨)라는 상담사가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두려워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쩌면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더 셰프>의 한 장면 중.
옳다. 어려움과 맞닥뜨릴 때 도망가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것만이 용기는 아니다.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때 타인에게 적절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용기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직면한 문제와 현실의 한계를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며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기는 참기름 같은 것이 아닐까(P.171~173)-
왜 우린 남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어째서 남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꼭 험담으로 채워지는 것인가? 그 험담이 통상적인 비방이나 헐뜯음을 넘어 인간적인 모멸을 주는 단계에 이르는 이유가 뭘까? 도대체 왜?
<모멸감>을 쓴 김찬호 사회학자에 따르면, 한국인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타인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순간 많이 행하는 방법이 상대에 대한 '모멸'이라고 한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주변을 보면 단순히 소문을 퍼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이 지닌 허물을 크게 부풀려 본인이 도덕적인 우월감을 느끼려는 목적에서 험담을 일삼는 이들이 많다. 험담의 표적을 업신여기고 경멸하면서 자신이 그 사람보다 온전한 존재임을 확인하려 든다고 할까.
-우월감을 느끼려고 험담에 가담하는 사람들(P.177~180)-
세상을 자유롭게 감각하고 자신만의 심미안으로 아름다운 걸 발견하는 사람, 이따금씩 타인의 마음에 따뜻한 말을 안겨주는 사람을 나는 신뢰한다.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거나
그런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이런 사람과는 떨어져 지내길 바랍니다(P.203~205)-
'맡은 자리의 주인이 되자'
제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다녔던 회사의 사무실 액자에 걸려 있었던 글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글인 것은 맞습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요?
문제는 회사일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하지만,
정작 내 마음에는 소홀한 경우가 많다는 것 같습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큰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 고민은 회사의 미래에 대한 고민, 회사 내에서 본인의 자리에 대한 고민,
가정에 대한 고민, 건강에 대한 고민 등,
그 종류가 수도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수 없이 많은 고민을 하면서 정작 놓치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내 스스로의 마음일 것입니다.
외부에 대한 고민만큼 더욱 중요한 것은
내 마음. 내 스스로에 대한 마음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항상 다른 사람, 다른 일이 자리 잡고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내 마음속에 나만을 위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어떨까요?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이야 말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