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과 타이프]
공중전화 부스와 전봇대 사이의 손바닥만 한 비좁은 공간, 여기는 누군가의 일터다. 거의 100살에 가까워 보이는, 내 몸집의 절반이나 될까 싶은 백발의 할머니가 매일같이 쪼그리고 앉아 직접 키운 농작물을 늘어놓는 곳이다. 파는 것이라고 해봤자, 자그마한 바구니 안에 담긴 옥수수와 감자 몇 알, 무 서너 개가 전부다. 그 옆의 흙 묻은 비닐봉지는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이것들을 전부 어떻게 가지고 나왔는지가 의문스러울 만큼 할머니의 몸은 너무도 작다. 이미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어쩌면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할머니가 앉아 있는 보도블록은 뒤틀려서 여기저기 튀어나왔고, 인근 식당에서 내놓은 쓰레기 더미가 잔뜩 쌓여 있을 때도 있다. 지난여름, 나는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땡볕 아래 앉아 있는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보았다. 한 인간이 온몸으로 이고 있는, 무겁디무거운 삶의 무게를 보았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약간의 찬거리를 사기도 하고 때로는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수중에 현금이라곤 전혀 없을 때 그렇다. 내가 할머니 앞을 그대로 지나쳐 어느 카페에 들어가 사 마실 커피 한 잔 값이 할머니의 하루치 생계비와 맞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나는 커피를 마실 것이다. 갖고 싶은 것이 생기면 지나친 과소비라고 생각되지 않는 한, 그걸 구입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가끔 이곳에 다다르기 전부터 오늘은 할머니가 나와 있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면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테니까.
내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어려움이나 고통 앞에서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그 앞에서 나는 늘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날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끔찍한 불행이라든지 허망한 죽음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뉴스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안도하거나 나의 불행이 누군가와의 비교로 인해 비로소 견딜만해지는 게 싫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어째서 누군가는 대리석이 깔린 집에서 살고, 누군가는 손바닥만 한 길모퉁이에서 생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채 매 순간 버텨야 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