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11

소설 연재

by 바달



아빠는 무거운 캐리어를 끌며 현관문으로 들어왔다. 늦은 저녁이었다. 공항으로 마중 나갔던 엄마도 뒤따라 들어왔다.

“설아, 아빠 오셨어.”

“... 오셨어요.”

자꾸만 코로 바람이 새어 나오는 탓에 설이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흐릿하고 거칠어져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비해 정겨운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래, 설아.”

아빠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수년째 해외 파견 근무 중인 아빠는 세 달에 한 번씩 집에 돌아왔다. 나날이 수척해지고, 목소리도 변해가는 딸을 마주하며 아빠는 매번 미안함과 괴로움을 미소 뒤에 감췄다.

설이는 그날 밤도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

“여보, 먼저 들어가서 자. 나는 시차 때문에 일찍 못 잘 것 같네.”

“글쎄, 나도 잠이 안 와서.”

부엌 식탁에 앉아 이야기하는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방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설이는 숨을 죽인 채 그 소리를 들었다.

“설이는 좀 어때. 전보다 많이 야윈 것 같네.”

“잘 먹질 못하고 있거든. 요즘엔 밥 먹을 때에도 맨날 사레들리고. 작게 잘라서 주는데도… 음식 삼키는 근육도 점점 약해져서 그렇대요.”

“잘 먹어야 할 텐데.”

“아예 삼키기 어려워지면 그땐 관을 꽂아야 한다나...”

엄마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빠는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왔을 때보다 발음도 많이 어눌해졌네.”

엄마는 조용히 훌쩍였다.

“여보, 설이 깨겠다. 방으로 들어가자.”

곧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흐느끼는 소리는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오랫동안 홀로 강인해야 했던 엄마는 남편의 품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차라리 일찌감치 잠들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설이는 늦은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설아, 오랜만에 외식할래?”

아빠가 설이의 방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는?”

“엄마는 좀 쉬라 그러자. 아빠랑 둘이 다녀오는 거 어때?”

“... 그래요.”

“여보, 내가 설이 데리고 저녁 먹고 올게. 당신은 집에서 쉬는 게 낫겠지?”

아빠가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엄마를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겠어요?”

“당연하지. 오붓한 시간 보내고 올 테니까 걱정 마.”

“뭐 먹으러 가게?”

“고기 구워 먹으러 갈까 봐. 근육에는 단백질이 최고잖아?”

“여보,”

엄마는 수돗물을 잠그며 말했다.

“잘게 잘라서 줘야 해요. 먹다가 목에 걸리면 큰일 나니까.”

둘만 보내기가 염려스러운 눈치였다.

“걱정 말래도.”

엄마의 도움을 받아 외출 준비를 마친 설이는 아빠와 함께 집을 나섰다. 아빠가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차 문을 열어 먼저 운전석에 올라탔다. 설이의 팔 힘이 자동차 문을 열기 어려울 만큼 약해졌다는 사실을 아빠는 모르고 있었다. 설이는 손등으로 자동차를 가볍게 두드렸다.

“설아, 문 안 잠겨있어.”

“아니…”

“아...”

그제야 설이의 말을 알아들은 아빠가 오른팔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설이가 차에 타자마자 아빠는 시동을 걸었다.

“안전… 벨트...”

“아, 그래.”

아빠는 다시 손을 뻗어 설이의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운전하는 내내 아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동안 아내가 혼자 얼마나 사소한 일까지 신경 써야 했을지 가늠하고 있었을 것이다.

식당 앞에 도착하자 아빠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아빠는 조수석 쪽으로 걸어와 설이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꽤나 널찍한 식당이었다. 손님은 많지 않았다. 점원이 불판을 넣어주자마자 아빠는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노릇노릇해진 고기를 잘게 잘라 접시에 올려 주면, 설이는 숟가락으로 고기를 떠먹었다. 쇠젓가락을 마지막으로 집어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포크 달라고 할까?”

숟가락으로 고기를 뜨려는 모양새가 불편해 보인 모양이었다. 마침 점원이 큰 쟁반에 밑반찬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혹시 포크 없나요?”

점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포크를 찾는 손님의 요구가 성가신 듯했다. 순간 잘게 잘린 고깃덩어리들을 점원이 눈치챌까 봐 몸이 움츠러들었다. 손으로 접시를 가리고라도 싶은 심정이었다. 스치는 사람들의 시선과 말투 하나하나에 이토록 위축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이젠 주어진 인생을 받아들이겠다고 되뇌었던 다짐이 무색했다.

입에서 한참 동안 씹고 있었던 고기가 고무처럼 질기게 느껴졌다.

“설아,”

주눅 들어 있는 딸을 보며 아빠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픈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설이는 고개를 숙인 채 잘게 잘린 고깃덩어리들을 숟가락으로 뒤적거렸다.

“도움 청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마.”

나지막한 아빠의 말에 대꾸할 힘이 없었다. 모르는 이들의 시선까지 신경 쓰느라 지쳐버린 탓이었다. 설이는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아빠의 말을 몇 번이고 되뇌고 있었다. 실은 믿어 보고 싶었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숨지 않아도 괜찮다고. 홀로 마음을 다잡는 것에 비하면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 것이, 그리고 그 말을 억지로라도 믿어 보는 것이 한결 수월할지도 모를 일이니.

정적 속에서 느린 식사는 계속되었다. 아픈 건 잘못도, 숨길 일도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어깨는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남들과 달리 단지 운이 조금 나빴던 것뿐이라 해도, 그것이 질병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근거일 수 있을까.


문득 설이는 희미해진 자신의 존재를 느꼈다.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기치도 내걸 수 없게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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