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아 있음의 환희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 모든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짊어지고 그의 사막을 달려간다. 가득 짐을 실은 채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하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말하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공부모임에서 회원들에게 물어보았다. “‘삶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살아 있음의 환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다들 합창을 한다. “살아 있음의 환희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을 할 것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삶의 의미를 부여하던 신이 죽었기 때문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는 것은 ‘살아 있음의 환희’라고 생각한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뜨거운 사막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그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상징이다.
그는 자신의 몸값으로 존재를 확인한다. 짐의 무게만큼 그의 허리는 앞으로 숙여지고 고개는 아래로 향한다.
그는 어떤 고난도 견뎌낸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해내야만 한다. 그가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이유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등에 진 짐을 다 뿌리쳐버린다. 사방을 향해 포효한다. 그는 자유다. 삶의 의무에서 해방된다.
하지만 사자는 삶의 의미가 없는 삶을 견디지 못한다. 그의 발은 자꾸만 허공으로 떠오른다.
삶의 의미가 가득 찬 낙타, 삶의 의미가 사라진 사자, 우리의 정신은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삶의 의미가 없는 자유는 공허하다. 그래서 사자에서 다시 낙타로 퇴화한 낙타들은 오아시스를 찾아 헤맨다.
그들은 신기루를 쫓다 일생을 마친다. 우리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 아이가 된 인간이 바로 ‘조르바’다.
그는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유정신이 찾아낸 ‘아이’다. 그는 조르바를 만나 자유를 완성한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주린 영혼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 책으로부터 빨아들인 영양분의 질량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의 질량을 돌이켜 볼 때마다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나는 격분과 마음의 쓰라림을 견디지 못한다.’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그는 죽어서 ‘영원한 아이’가 되었다. 니체는 “아이는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라고 말한다.
아이는 삶의 의미를 망각한다. 삶의 의미가 없기에 그는 늘 ‘창조의 유희’다. 아무리 힘들게 탑을 쌓아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그는 늘 천지창조를 하고 있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살아서 팔딱거리는 심장,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대지에서 아직 탯줄이 끊어지지 않은 거칠고 야성적인 영혼, 가장 단순한 인간의 언어로 이 노동자는 내게 예술, 사랑, 아름다움, 순수, 정열의 의미를 뚜렷하게 일깨워 주었다.’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에게 말한다.
“진흙 덩이를 들고 원하는 건 뭐든 만든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시오? ‘주전자를 만들어야지!’, ‘접시를 만들어야지.’, ‘석유램프를 만들어야지.’, 이렇게 중얼거리지. 내 분명히 말하지만, 이렇게 외친다는 건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거요. 자유 말이오!”
삶의 의미와 살아 있음의 환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 둘이 통합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아이는 살아 있음의 환희이면서 동시에 삶의 의미를 무수히 만들어낸다. 우리는 아이가 창조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